
◎ 본문: 눅 3:1-14
◎ 제목: 세례요한의 선포, 참된 회개
1. 본문개요 및 관찰
1) 1-6절: 세례 요한의 등장
A. 세례 요한 등장의 역사적 정황(1-2절)
B. 회개의 세례 전파(3-6절)
2) 7-14절: 세례 요한의 요단강 사역
A. 요한의 회개 선포(7-9절)
B. 무리의 반응와 요한의 촉구(10-14절)
2. 적용
누가의 직업은 ‘역사가’이면서 ‘의사’ 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복음을 서술함에 있어서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많이 기록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당대의 주요 정치 지도자들을 언급하면서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 정치가들을 보면 세례 요한 보다 더욱 영향력이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팔레스타인의 잘 알려지지 않은 한 선지자를 통해서 당시 로마 통치자들의 통치를 흔들고, 인류 역사의 궁극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 1-2절에는 정확한 연대가 나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디베료 황제’는 티베리우스 황제로, ‘아우구스티누스’를 뒤이어 황제가 된 사람입니다. 그러면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지 열다섯 해’면, 티베리우스 황제가 즉위한 연도가 AD 14년 이기 때문에, ‘열다섯 해’는 AD 28-29년 사이로 추정할 수 있는 겁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허구의 인물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이라는 인물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 그러한 예수의 정신을 신봉하는 일부 집단이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 신화라는 겁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을 따르면 그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이론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의 역사성을 믿어야 합니다. 성령으로 처녀의 몸에 잉태되어 성육신하신, 그래서 이 땅에 ‘사람의 아들’로 살아가다가, 사람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이 세상의 모든 인생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고, 하늘로 승천하신 실제 인물이라는 사실을 누가는 계속해서 주지시키고 있는 겁니다.
1-2절에 나열된 정치종교지도자들은 세상의 중심부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와 달리 세례 요한은 빈들에 있었습니다. 4-6절에 ‘구약의 예언’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는 이미지와 연결됩니다. 세례 요한은 변방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중심부’에 임하지 않았습니다. 빈들에 임했습니다. 사실 ‘빈들’은 어떤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보잘것없어 보이는 곳입니다. 하지만 ‘결핍의 장소’인 빈들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갈망하며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었고, 그 환경에 놓인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임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 별명처럼 3절에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베풀기 시작합니다. 그 회개의 세례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시킵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어떤 마음이 준비되어야 할까요? 바로 ‘가난한 마음’입니다. 여기에 계시는 모든 성도님들은 바로 그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 한 분도 빠짐없이 주님을 만나 구원의 자리에 서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우리는 ‘세례 요한’의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을 만났 듯,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을 만나도록, 그들 마음의 높고 깊은 골짜기를 깎고 메우는 일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 감당해야 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7-14절은 세례 요한의 설교입니다. 먼저 7-9절을 통해 요한은 회개할 것을 선포합니다. 세례 요한은 8절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말로, 회개가 ‘일시적으로 누군가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일시적으로 송구스러운 마음을 가지는 것이 회개가 될 수 없습니다. 여전히 죄를 정리하지 못하고, 마치 개가 자신의 토한 것에 다시 드러눕는 것과 같이 그 길로 돌아가는 것은 결코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합당한 회개는 없이 교회당만 드나드는 것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붙들고 나는 이미 구원받은 선택받은 ‘선민’이라고 고집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붙드는 행위를 ‘돌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 혈통은 구원 받는데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돌’ 같은 쓸모없어 보이는 존재라고 할지라도 복음을 믿고 합당한 회개의 자리에 나아간다면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받는다는 말이지요.
우리 신앙의 현주소가 어떠한지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는 이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다시 우리에게 기회를 주고 계시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는 매 순간 예배의 자리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기회를 얻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다시 우리가 찍어버리고 돌이켜야 할 ‘죄의 자리’를 가르쳐주시고 지적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돌이켜 그 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으로 그분께 응답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우리를 향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삶이라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10-14절에서는 각 사람들에게 자신의 형편에 맞는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실천사항’을 나열합니다. 세리에게는 그들의 ‘세금 징수’ 행위와 관련된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군인들에게는 그들의 ‘힘과 권력’을 남용하지 않는 방법으로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각자에게 가장 알맞은 것으로 제시되고 있죠.
우리가 듣는 설교가 우리의 삶에 적용될 때, 결코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적용’은 있을 수 없음을 말합니다. 결국 이것은 ‘회개의 열매’가 어떤 방식으로 각자의 삶에서 이루어져야 하는가 하는 한 단면을 우리에게 설명해 줄 뿐만 아니라, 그 열매는 세상에서 분리되어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사람들과의 관계 가운데 맺혀져야 하는 것임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또한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큰 힘을 주셨다면 그것은 누군가를 더 많이 사랑해야 할 책임을 동시에 가지고 있음을 기억하게 합니다. 힘을 가지고 그것을 함부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폭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만 ‘물리적인 힘’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나의 ‘지식’이 힘이 될 수도 있고, 나의 ‘위치’가 힘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간, 이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 각자가 가지고 있는 ‘힘의 크기’만큼 ‘책임의 크기’도 함께 키워가고 있는지 묻고 계십니다. 그리고 나의 힘의 크기만큼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관용하는 정신을 가질 때 그것을 ‘사랑의 계명’을 지킨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는 말이지요.
세례 요한은 요단 강에서의 사역을 통해 ‘엘리트적인 종교 행위’에 헌실할 것을 요구하는 기존의 종교지도자들과 달리 오직 ‘회개의 바른 길’을 제시합니다. 이를 통해 당시에 인기 없었던 세리와 군인들도 회개한다면 하나님의 바른 길을 준비할 수 있음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도리어 요한을 감시하러 온 ‘바리새인’들을 향해 회개의 마음이 없다면 ‘독사의 자식’과 다름 없다고 일갈하기도 하였습니다. 회개는 사람의 삶의 태도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는 도움이 필요한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하는 일을 포함합니다. 나 자신이 참된 회개의 길을 걷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그 길을 온전히 걸어가기로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