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눅 9:28-36

◎ 본문: 눅 9:28-36
◎ 제목: 변화산에서 드러난 영광

1. 본문개요 및 관찰
    1) 28-31절: 변화산의 예수
        A. 기도 중 변모하신 예수(28-29절)
        B. 모세와 엘리야 출현(30-31절)
    2) 32-33절: 베드로의 반응
    3) 34-36절: 천상의 소리

2. 적용
    오늘 본문 28절에 ‘이 말씀을 하신 후에 팔 일쯤 되어’라고 시작되는 이유는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앞의 27절의 말씀과 의미적으로 연결하기 위함입니다. 27절에 예수님게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말씀과 특별히 뽑으신 3명의 제자들과 함께 산으로 올라가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된 사건을 연결시키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의 첫 번째 징조로 이 변화산 사건을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변화산 사건’에서 가장 극적인 부분은 본문 30-31절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대화하는 부분입니다. 특별히 31절에 이 두 사람이 함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말합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리자’로 ‘하나님의 율법’을 대신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해 주었습니다. 그러하기에 모세의 등장은 ‘율법’을 상징합니다. 또한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입니다. 메시야의 오심을 예언한 선지자들을 대표하지요. 마태복음 5:17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 이 장면을 통해 확인됩니다. 그분은 율법의 대표인 모세와 선지자의 대표인 엘리야와 만나심으로 ‘율법과 말씀의 예언’의 완전한 성취자 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이러한 ‘위대한 만남’의 자리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의 죽음’이 의논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31절에 ‘별세’라는 단어는 원어성경에 ‘엑소더스’를 번역한 것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은 ‘출애굽’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드는 동시에, ‘새로운 출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열어젖힌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이에게 그 ‘영생의 길’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하십니다.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진정한 출애굽의 사건이 우리 각 개인에게 일어난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변화산 사건에서 예수께서 ‘왜 자신의 죽음을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하셔야 했는가?’라는 의문에 대해 답을 얻게 됩니다. 주님의 부활과 승천에 대한 예고편과 같은 이 그림을 통해 결국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구원’은 결코 거저 주어지지 않고, 반드시 ‘고난과 죽음의 자리’를 지나가야만 얻게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종종 ‘고난 없는 영광’을 구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여다보십시오. 어려움은 빨리 지나가든지, 아니면 오지 않기를 바라는 기도가 우리 기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은 진정한 영광스러움’은 ‘고난의 자리, 죽음의 자리’를 지나가지 않고는 절대로 얻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 주십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본문의 앞부분인 9:23절을 통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에 대한 제자도를 설명하신 것과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이 ‘변화산 사건’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영광의 자리에서도 ‘죽음’을 이야기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죄로부터의 출애굽’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29절에 죽으심에 대해 순종하시기로 작정하는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은 그것을 기쁘게 받으신 후에 예수님을 영광스러운 형체로 변형되는 것을 미리 맛보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 구원받은 성도가 마땅히 걸어가야 할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갈 때, 그 영광스러움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삶의 자리에서 주님이 보여주시는 대로, 주님이 가르쳐주시는 대로 십자가의 삶을 살아드리기로 결단하는 기도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 결단으로 말미암아 정말 예수님이 경험하셨던 그 영광스러움을 우리의 생애에서도 꼭 맛볼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는 가운데 놀랍게 변화되셨습니다. 그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하얘져 광채가 났습니다. 이러한 영광스러운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데 함께 따라간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32절에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이 산에 올라오기 약 8일 전쯤에 예수님께서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말씀을 하신 후에 그 모든 것을 감당할 능력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 지금 이 산에 올랐습니다. 그곳에 특별히 따로 떼어서 동행 한 제자들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깊이 졸고 있습니다.

    오늘 33절에 나타난 영적으로 민감하지 못하고 아둔한 세 제자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베드로와 두 제자는 율법의 대표인 모세와 선지자의 대표인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하는 ‘영광스러운 자리’를 경험하고는 고작 한다는 소리가 ‘초막’을 짓겠답니다. 무슨 말입니까? ‘여기에서 살겠다.’는 겁니다. 자신들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할 만큼 ‘비몽사몽’간에 ‘횡설수설’하고 있습니다. 34절에 이러한 제자들에게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고, 35절에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횡설수설하는 제자들을 구름으로 감싸 안으시고는 그들에게 현실을 다시 바라볼 수 있도록 졸린 눈을 부릅뜨고 정신을 차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택함을 받은 자, 나의 아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제자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오직 예수님만 보이고, 모세와 엘리야는 떠나갔습니다. 세 명의 제자들은 그들의 ‘황홀경’과 같은 경험이 영원할 줄 알았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앞선 27절에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응답 되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초막을 짓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여기에서 영원히 거하고 싶은 욕구가 일어났겠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만 영적 민감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하고, 개인적인 말씀 묵상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의 자리에서 설교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영적 민감함’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자신이 ‘십자가 죽음’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들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재대로 듣지 않으니까 ‘초막’을 짓고 이 영광스러움을 길이길이 간직하며 여기에 눌러 앉으려합니다. 우리도 영광스러움만 취하려는 어리석음을 내려놓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매 순간마다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영적 민감함’을 유지하는 삶을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리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하늘의 신령한 복들’로 우리들의 인생이 가득 채워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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