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본문: 눅 9:37-50
◎ 제목: 섬김의 역설
1. 본문개요 및 관찰
1) 37-43a절: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
A. 산 아래 제자들의 위기(37-40절)
B. 책망과 치유(41-43a절)
2) 43b-45절: 두 번재 수난 예고
3) 46-50절: 누가 크냐
A. 제자들의 변론과 예수의 가르침(46-48절)
B. 요한의 질문(49-50절)
2. 적용
예수님과 세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내려오자마자 ‘남겨진 제자’들이 엄청난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한 귀신 들린 아이가 경련을 일으키고 거품을 흘리며 스스로 자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아무런 손도 써보지 못하고 그저 무능력하게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40절에 아이의 아버지가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주기를 구하였지만, 그들이 능히 못하더라고 예수님께 하소연합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앞선 누가복음 9:1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분명히 제자들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셨습니다. 그러함에도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41절에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라고 말하시면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셔서 아이를 고치시고 그 아버지에게 도로 돌려주십니다. 제자들이 왜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주님은 그것을 ‘믿음의 문제’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은 ‘기도’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평행본문인 ‘마가복음 9:28’에 제자들이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주님의 대답도 ‘기도’였습니다. 기도 없이는 아무리 능력과 권위를 갖추고 있다 할지라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위탁하는, 맡기는 기도가 능력 있는 기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믿음이 있는 자리에서는 귀신이 제멋대로 실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능력과 권위를 부여받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가 없다면 ‘마귀의 노예’ 상태인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고통과 삶의 고단함을 맛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귀신 들린 아이들 고쳐주심으로 ‘믿음’만이 ‘패역한 세대’ 가운데 승리할 수 있는 방법 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후에 44절에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실 것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시면서 ‘고난과 죽음’을 첫 번째로 이야기하셨고, 귀신을 쫓아내셔서 ‘하나님의 위엄’에 여러 사람들이 놀라는 귀한 대접을 받으실 찰나에 또 죽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44절에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가운데에서 제자들은 ‘아무런 능력’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에 비로소 그 비밀을 알았고, 담대하게 예수님처럼 살면서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삶’이 진정한 ‘믿음의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시간 기꺼이 주님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는 ‘참 믿음의 능력’을 회복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46-50의 말씀은 45절의 ‘철저하게 무지의 상태’에 놓여 있는 제자들의 모습과 연관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귀신으로부터 건져내실 때 보이신 ‘그 영광스러움’을 보고는 두려워서 ‘질문조차 못합니다. 몰라서 두려워하고 두려운 나머지 묻지를 못하니까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제자들의 ‘무지의 악순환’이 46-50절에 나타납니다.
먼저 46-48절에서는 제자들이 ‘누가 크냐’라는 변론을 벌입니다. 예수님이 1인자이니까 누가 2인자냐는 논쟁을 벌인 겁니다. 왜 제자들은 이런 논쟁을 벌입니까? 예수님께서 거듭 말씀하신 ‘인자의 고난을 받음’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고 무지했을 뿐만 아니라 ‘영광스러움’만을 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 어쩌고저쩌고하는 거 보니까 이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왕이 되시려나 보다!’라고 생각을 하면서, 그렇다면 국무총리도 장관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자리는 제자들이 ‘경쟁’을 통해서 정해야 한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런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47절에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가다 자기 곁에 세우시고는 48절에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나를 보내신 이, 즉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니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자가 큰 자라고 그들의 생각과는 정반대를 이야기하십니다. 낮아지지 않으면 결코 큰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거죠.
49-50절의 말씀도 ‘제자들의 권력 논쟁’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49절에 요한이 예수님께 ‘예수님! 어떤 사람이 당신의 이름으로 귀신 내쫓는 것을 보았는데, 그 사람에게 우리를 따르라고 하니까 따르지 않아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했습니다.’라고 보고합니다. 이 보고를 드리는 요한의 목소리에는 얼마나 ‘확신’이 차 있었을까요. 하지만 요한의 이러한 생각은 ‘결연한 의지’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가 혹시나 생각한 대로 ‘자랑할 만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편협한 특권의식’에 불과했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바로 50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응답’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금하지 말라! 반대하지 않는다면 너희를 위하는 자다.’라고 말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교회 봉사를 하다 보면, 이런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특정한 일에 대해 내가 ‘전문가’라는 생각을 하다 보면 다른 사람이 잘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안타까움에 빠집니다. 우리 교회가 잘하는 것은 다른 교회는 잘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 마음속에 ‘그렇지! 우리만 독점하는 것 아니지, 나만 독점하는 것 아니지’라고 속으로 끄떡여도, 막상 우리에게 그런 상황이 닥치면 오늘 ‘요한’과 같은 태도를 우리가 보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자녀 됨’에 대한 ‘그릇된 특권의식’이 자리 잡혀 나의 직분, 나의 봉사의 일, 우리 교회의 탁월함이 ‘나의 영향력, 나의 존재, 교회의 세력’을 드러내는 그 무엇’으로 왜곡되면 나도 모르게 오늘 ‘요한’이 저지르는 실수에 사로잡힐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새벽에 결단하며 나아갑시다. 자기 암시나 주장하는 듯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 드리는 믿음의 기도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매 순간 연약하고 소외된 자들을 섬기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경험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큰 사람으로 세워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서로 잘잘못을 따지는 소모전 하지 않고 진정 서로를 세워주고 상대의 은사를 존중하며 함께 아름다운 ‘하나님의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