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본문: 눅 17:1-10
◎ 제목: 당연하고 마땅한 제자도
1. 본문개요 및 관찰
1) 1-4절: 제자들이 조심해야 할 것
A. 실족하게 하는 자의 화(1-2절)
B. 용서하라(3-4절)
2) 5-10절: 종의 제자도
A. 겨자씨 비유(5-6절)
B. 종의 비유(7-9절)
C. 종 된 제자들(10절)
2. 적용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의 눈과 칭찬을 의식하며 살아갑니다. SNS에 ‘인증샷’과 ‘좋아요’에 목말라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러한 시대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고 예수의 제자로서 우리는 그 당연하다 여겨지는 것에 오히려 무심해져야 합니다. 제자로 사는 것은 특별한 것도, 주목할 만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제자라면 주목받기 어려운 작은 자를 섬기고, 용서를 실천하며,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이 당연하고 마땅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예수의 제자’들에게 필요하다는 거죠.
17장으로 넘어오면서 예수님의 시선은 바리새인들로부터 제자들에게로 향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각별히 조심해야 할 것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실족과 용서’, ‘종으로서 제자들이 가져야 할 마땅한 태도’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먼저 1-4절은 ‘실족과 용서’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먼저 1절에 등장하는 ‘실족’은 예수님의 종말론적 사역을 오해하고 믿지 못하여 죄에 걸려 넘어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먼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믿음에서 실패하여 ‘실족’한 상태였고, 그러한 이들로 인하여 수많은 유대인들이 걸려 넘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런 일이 ‘제자’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선 14장부터 거듭하여 제자도의 핵심인 가난한 자, 즉 갚을 것이 없는 자들을 환대하는 일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일에 실패한다면, 반드시 누군가를 실족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는 거죠. 예수님께서는 1절에 실족하게 하는 일은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먼저 강조를 하십니다. 하지만 이것은 실족을 허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불가피하다고 해서 책임이 면제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제자들은 충분하게 주의하지 않으면 약자를 실족하게 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예수의 제자로서, 성도로서 선한 일을 한다는 자부심 때문에 ‘작은 자, 가난한 자, 갚을 것이 없는 자’에 대한 민감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가난한 자, 믿음이 약한 자, 상처 받기 쉬운 자를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좋은 마음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남에게 베푸는 과정에서 없는 자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해야 하는데, ‘내가 너에게 베풀기 때문에 네가 그나마 먹고 사는 거다!’라는 느낌을 주도록 만든다면 그것이 바로 ‘실족’하게 하는 것이 되겠지요.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행위는 그 받을 벌이 크기 때문에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실족하지 않게 하려면 철저하게 ‘존중과 관심과 사랑’으로 자신을 무장해야 합니다. 아무리 잘 베풀고, 다른 이들을 위하는 삶을 산다 할지라도 ‘무관심과 무정함’으로 그 일을 행한다면 실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를 섬기고 돕는 일을 함에 있어서도 상대를 배려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일이 몸에 배이도록 자신을 잘 훈련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3-4절은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이어집니다. 용서는 예수의 제자가 가지게 되는 대표적인 ‘표지’입니다. 표지를 보면 책의 내용이 어떤지 대충 알 수 있듯, ‘용서’하는 모습이 결국 나를 예수의 제자로 드러나게끔 만든다는 거죠. 모든 사람은 용서받고 용서하며 살아갑니다. 형제가 죄를 지으면 잘못을 돌이키도록 꾸짖되 회개하면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용서에는 결코 ‘제한이나 조건’이 없어야겠지요. ‘네가 ….한다면 용서할게.’ 그것은 진정한 용서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 조건이 없는 용서여야 합니까? 하나님의 용서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끝이 없습니다. 그 끝없는 용서가 저와 여러분을 키웠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 지금 나를 존재하게 만든다는 거죠. 그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은 제자라면, 고스란히 그 사랑과 용서를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서로를 향한 용서와 사랑으로 세워진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용서만이 사람을 살리고 공동체를 세웁니다. 전대중앙교회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배워 형제, 자매에게 그대로 실천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이어지는 5-10절은 종의 제자도를 ‘두 개의 비유’를 통해 드러냅니다. 5절에 ‘사도들’, 즉 예수님이 직접 세운 열두 제자들이 예수님을 향해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먼저 ‘겨자씨 비유’를 꺼내어 답을 주십니다. 밭에 뿌려지는 씨 중 가장 작은 씨인 겨자씨는 앞선 13장에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설명하는 비유로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에서는 ‘믿음의 크기’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믿음만 있어도 큰 일을 너끈히 감당할 수 있음을 ‘겨자씨’를 통해 강조합니다. 이 비유에서 ‘뽕나무’도 등장하는데, 뽕나무는 밭에 심긴 것들 중 가장 뿌리를 깊이 내리는 큰 나무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겨자씨 만 한 적은 믿음이라도 깊이 뿌리 내려 뽑히지 않을 것 같은 뽕나무에게 명령하여 뽑혀 바다에 심기라 하면 뽕나무가 순종한다는 거죠. 필요한 것은 ‘많은 믿음’이 아니라 ‘적더라도 참된 믿음’임을 강조하십니다. 겨자씨만 한 믿음만 있어도 순종은 가능하며, 역사하는 능력은 크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믿음과 연관하여 7-10절에서는 ‘종의 비유’를 들어 가르치십니다. 종은 온갖 바깥일을 하고 왔어도 돌아와 집안일을 해야 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므로 주인은 종에게 고마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종은 모든 일을 끝내고서야 먹고 마심에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여긴다는 거죠. 예수님은 ‘겨자씨만 한 믿음’을 소유하여 큰 믿음의 역사를 보게되는 제자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순종의 익숙함’에 대하여 연결지어 가르치십니다. 종에게는 주인이 명한대로 행할 의무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작은 믿음이라도 참된 믿음을 소유한 예수의 제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대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는 고백만을 남긴다는 거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인을 섬기는 종이니 대접받고 칭찬받고 높임 받기를 기대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 자체가 축복이며, 구원받아 하나님 자녀 된 것만도 감사한데 봉사의 일까지 하게 하심이 은혜임을 붙잡는 예수의 제자는 최선을 다해 수고한 후에도 겸손할 수 있습니다. 세상 가운데에서 인정받고 대가를 받음이 당연한 세상 속에서, 도리어 섬기고 수고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높은 제자도의 모습을 보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