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눅 18:1-8
◎ 제목: 주님이 원하시는 기도
예수님 시대의 모든 법정 소송에서 ‘재판장’은 현대의 판사 보다 더욱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잇었습니다. 재판의 결과가 재판장이 원고와 피고 중, 어느 쪽의 정당성을 인정해 주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물론 그 시대에도 법은 있습니다. 하지만 ‘재판장의 성품과 정의에 대한 의지’가 결과를 좌우합니다. 그래서 그 재판관이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드장하는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도 무시하는 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계명,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완전히 반(反)하는 사람입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 당시의 법정의 풍경에 이 ‘재판장’을 대입해 보면 정답이 나옵니다. 그 재판장이 재판하는 법정에서는 ‘어떠한 정의’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말이지요.
반면 오늘 본문의 또 다른 인물인 ‘과부’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말씀을 통해 과부의 원수가 누구인지, 어떤 원한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과부는 무언가 ‘억울한 사연’이 있습니다. 그래서 재판장이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자신의 손을 들어주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당시 여성은 자신에게 어떤 ‘법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때, 반드시 자신의 법적 후견인을 세워야 합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라면 아버지가, 결혼을 했다면 남편이, 남편과 사별했다면 아들이 법적 후견인이 됩니다. 그런데 과부입니다. 어떠한 법적 후견인도 없습니다.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선택은 하나입니다. 매일 재판장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원한을 풀어주는 결정을 내릴 때까지 밤낮 졸라대는 일! 그것이 ‘과부’의 유일한 선택이었습니다. 계속 찾아갑니다.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호소합니다. 그런데 과부가 그렇게 매일 찾아가서 강청함에도 불구하고, 4절을 보니까 재판장은 ‘얼마 동안’ 들어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얼마 동안’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크로노스’입니다. 즉, ‘절대적인 시간’, 어느 누구도 건드릴 수 없이 흘러 보낼 수밖에 없는 시간이라는 의미이지요. 재판장은 그렇게 시간만 보내고 있었습니다.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면, 자신은 자기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시한 ‘과부의 원수’의 손을 들어주면 그만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5절에서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어 버립니다.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다소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나를 번거롭게 하기 때문에’ 그녀의 원한을 풀어 주겠답니다. 과부가 그 끈질기게 찾아와서 번거롭게 한 일이 재판장을 괴롭게 해서 재판장이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도 무시하면서 왜 이렇게 아무런 힘도 없는 ‘과부의 끈질긴 방문’이 재판장에게 ‘괴로운 것’이 되었냐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괴롭게하다’에 해당하는 원어성경 원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주먹으로 얼굴이 맞아 붓고 변색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권투 용어’였다고 합니다. 안면을 가격당해 엄청난 타격을 받을 정도의 충격이 재판장에게 있었다는 것을 은유하는 표현입니다. ‘과부의 끈질긴 간청’이 재판장에게 ‘큰 두려움’으로 작용했다는 말이겠지요. 왜 이것이 재판장에게 그렇게 큰 두려움이 된 것일까요? 우리가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동의 명예와 수치의 문화’에 기반 한 ‘기사도’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중동에서는 여자에게 ‘기사도’를 보여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한 사내는 스스로 자신의 명예를 심하게 훼손당할 뿐만 아니라 가문, 더 나아가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의 명예까지도 실추시키는 일이 됩니다.
과부가 울며불며 매일같이 재판장의 사적인 공간에 와서 하소연하고, 때로는 악을 쓰면서 욕설을 퍼붓기도 하는 상황이 계속되어 이 상황이 장기화 될 수록 불리해지는 쪽은 ‘재판장’입니다. 주변의 문화적 맥락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저 남자는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여자가 저렇게 매일같이 와서 뭔가를 부탁하는데 저 남자는 창피하지도 않나? 저 남자의 가족들은 왜 이런 상황을 방치하고 있는 거지? 이거 원 마을 부끄러워서 말이야…’ 이런 재판장에 대한 평가는 그를 ‘괴롭게’ 하는 겁니다.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되는 겁니다. 결국 재판장은 과부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는 1절에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교훈을 ’과부와 재판장‘이라는 두 인물의 이야기 비유로 우리에게 주셨을까요? 과부는 당연히 제자들과 동일시됩니다. 주님의 제자는 정말 불리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기도해야 한다는 겁니다. 실제로 제자들의 상황이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그것을 강력하게 각인시켜주고 싶으셨던 겁니다.
더불어 ‘재판장’과 ‘하나님’을 강력하게 대조합니다. 힘없는 과부가 붙잡을 수밖에 없었던 유일한 끈은 ‘하나님에게든 사람에게든 어떠한 공의로움을 찾아볼 수 없는’ 재판장이었지만, 우리가 붙들 끈인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이 하나님은 ‘참으로 공의로우시고 신뢰할 만한 분’이라는 사실을 강력한 대조로 제자들에게 그리고 지금 여기에 앉아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알려 주고 계시는 겁니다. 우리가 구하는 대상이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기도하기를 쉬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이렇게 정리를 하고 끝내버리면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얻게 되는 교훈은 ‘재판장에게 강청하여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낸 과부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열심히 때를 써서 필요한 것을 얻어내는 기도를 드려야겠다.’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과연 그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일까요?
우리가 좀 더 관심을 기울여 보아야 하는 것은 오늘 과부가 열심히 찾아가서 강청하자, 재판관의 ‘성품’이 바뀐 것은 아니라는 지점입니다. 재판장은 ‘밤낮 부르짖는 과부의 원한’을 풀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정의의 사도’가 되어 해결해 준 것이 아닙니다. 연약한 여자를 공손하게 대하지 않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개인과 가문의 명예가 실추될 것을 두려워하여 떠밀려 풀어 준 겁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선하고 공의로운 성품’ 때문에 택하신 자의 원한을 풀어주십니다. 그 내용이 바로 7절 말씀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가 ‘나의 강청하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다른 행동을 취하실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처분’에 대한 신뢰가 있기에 그 힘으로 계속 기도할 수 있다는 거죠. 지금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도를 잘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그런 생각으로 기도하실 때가 있지는 않으십니까? 내가 드리는 기도의 내용이나 방식으로 하나님의 결정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기도할 때는 없으시냐는 말입니다.
우리는 ‘과부의 끈질긴 신원’이 재판장의 결정을 바꾼 것을 성도와 하나님의 관계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습니다. 그대로 적용한다면 우리도 과부처럼 적극적인 행동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영향을 받아 행동을 바꾸신다는 전제를 가지게 됩니다. 이런 전재는 결국 우리의 기도를 ‘대가’를 치르는 것으로 여기게 만듭니다. 우상숭배하고 똑같은 겁니다. “내가 이만큼 기도하고 구했으니, 하나님은 답을 내십시오.” 이런 태도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올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중심의 ‘공의와 사랑’으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주권적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그것이 유일한 소망이기에 기도하는 것이지, 내가 때 쓰면 다 들어주시기 때문에 기도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8절에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라고 할 때에 ‘속히’가 우리의 차원에서의 ‘속히’가 아니라 하나님의 차원에서의 ‘속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8절 말미에 왜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물음표를 그리셨는지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속히’ 내 앞에 ‘금 나와라 뚝딱!’처럼 무언가 해결이 되기를 원합니다. 빨리 결론이 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간에 대한 생각과 우리의 시간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는 겁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기도의 태도를 바꾸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항상 기도하며 낙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의 공의’에 잇대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종말의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해합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그 날이 종말의 때라고요.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였고, 마지막 심판이 유보된 지금 이 시대가 바로 ’종말‘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여기 앉아 있는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이라는 사실을 마음이 새기셔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과부가 바로 저와 여러분이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교회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올려 드리는 기도는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든, 공동체적인 것이든 ‘종말론적 기도’가 될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공의로우시고 반드시 심판을 이루시고, 그것도 속히 이루실 하나님이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계신다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늘 하며, 하나님께서 속히 이루시는 기도의 응답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