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본문: 눅 20:1-18
◎ 제목: 나의 자리
1. 본문개요 및 관찰
1) 1-8절 종교지도자들과의 권위 논쟁 A. 그들의 질문과 예수의 질문(1-4절) B. 그들의 대답과 예수의 대답(5-8절)
2) 9-18절 포도원 농부 비유 A. 종을 능욕한 악한 농부들(9-12절) B. 아들을 죽인 악한 농부들(13-15a) C. 주인의 귀환과 보응(15b-18절)
2. 적용
할렐루야, 이 시간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위해 나아오신 성도님들 한분 한분 모두를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오늘은 누가복음을 통해 “나의 자리”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성도님들 산헤드린 공의회에 대해 아시나요? 산헤드린은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의 우두머리 모임입니다. 그들의 입장은 유대교를 대변할 뿐만 아니라 모든 권력의 집합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산헤드린의 최고 권위자들이 성전에서 가르치시던 예수님께 찾아옵니다. 그들의 논점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권위가 참인지에 대한 논의입니다. 더 나아가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악한 영으로부터 온 것인지에 대한 문제이죠. 마귀도 권위가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법령인 미쉬나를 보면 거짓선지자나 거짓 영으로 행하는 자들은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들은 질문합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행하며, 이런 권위를 준 자가 누군지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당시 랍비들의 관행에 따라 되묻는 방식으로 오히려 질문합니다.
그들은 그 질문을 서로 의논하며 생각하자 스스로 외통수에 다다름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결국 답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책잡고자 한 그들의 의도는 스스로를 책잡게 만들었고 더 이상 어떤 주장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들은 스스로 모른다고 하지만, 사실 알지 못 하는게 아닙니다. 정확히는 알고 싶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위치일지 모릅니다. 요한도 그렇고 예수님도 그렇고, 자신의 확고부동한 자리를 침범하고, 이제는 말씀보다 앞서버린 장로들의 전통을 지켜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되려 당해버린 그들 앞에서 예수님은 한 가지 비유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알고있는 포도원 주인과 농부들의 비유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에 갑니다. 때가 차서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자신의 한 종을 포도원으로 보냅니다. 이러한 관습은 히브리 지역에서 익숙한 문화입니다.
하지만 도착한 종은 소출을 받지도 못하고 몹시 맞은 다음 주인에게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주인인데, 맞고 온 종을 본다면 어떻게 행동하시겠습니까? 오래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사람들을 잔뜩 대려가서 포도원의 농부들을 진멸 할 것입니다. 그들은 패역한 농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 사람의 당연한 생각이요. 대응일 것입니다
하지만 포도원 주인은 사람의 생각과 전혀 다르게 행동합니다. 그는 다시 다른 종을 보냅니다.
그들의 잘못을 뉘우쳐 다시 한번 옳게 행동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참으로 은혜를 베푸는 주인인 것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 종조차 몹시 때리고 이번에는 능욕까지 해서 거저 보냅니다. 이제는 두 번째입니다. 한 번 기회를 주었지만 그들은 오히려 그 선을 악으로 갚았습니다. 이젠 할 만큼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주인은 포도원의 농부들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줍니다. 다시 종을 보냅니다.
그의 사랑은 이번에도 기회를 줍니다. 하지만, 그 주인의 선함에도 불구하고 세 번째 종까지 때려 보냅니다. 그들의 행동은 이미 한참부터 상식을 벗어납니다. 종들을 때려 보낸다고 한들 그 포도원은 자신들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자신들이 경작하고 있다고 한들 그 땅은 자신들의 소유가 아닙니다. 결코 그들의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이제는 정말 진멸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세 번이나 참아 준 주인은 고민합니다. 13절을 보면 “어찌할까”라는 주인의 독백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답은 당연히, 가서 모두를 죽이는 것입니다. 이게 마땅한 것입니다. 불순종과 패역을 일삼는 종들에게 그 결과는 당연히 죽음일 것입니다. 하지만 포도원 주인은 그 고민의 답으로 자신의 아들을 보낼 것을 결심합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포도원 주인이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주인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아니,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그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혜를 보여줍니다. 거절당하고, 불순종으로 응수하더라도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주인은 헬라어 원어처럼 “큐리에” 우리의 주인 하나님 아버지셨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갚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방법은 무조건 적인 사랑으로 농부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끝끝내 농부들은 반역을 선택합니다. 그 사랑을 헌신짝처럼 취급합니다. 그들은 아들을 보고 수근거립니다. 아들을 상속자이므로, 그를 죽이면 그의 유산이 자신들의 것이 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들의 악한 생각은 결국 그 아들을 죽이기에 이릅니다. 결국 그 주인은 포도원 농부들을 진멸합니다. 그리고 그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맡깁니다.
예수님과 세상의 권위 잡은 자들의 대화, 그리고 비유의 말씀.
우리는 이 두 가지 말씀을 통해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권위 잡은 자들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예수님의 행보가 거슬립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 그리고 그 표적들은 자신들이 평생을 쌓아 올리고 이루었던 어쩌면 말씀의 권위보다 더 앞세운 장로들의 전통을 무너트릴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맡은 청지기의 역할보다 그 “자리”가 더 중요합니다.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죠.
포도원의 농부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고용 된 자들입니다. 자신들의 밭이 아닌 곳에서 주인을 위해 일함으로 삯을 받는 자들이죠. 그들이 주인의 소유를 차지할 것만 같다는 착각에 휩싸였을 때 그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방법을 저지르게 됩니다. 하지만 농부들은 알아야 했습니다. 그 상속자인 아들을 죽인다 한들 그들은 결코 그 땅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단지 맡겨진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나요?
우리는 이 교회를 떠나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가정에서는 부모님이 되며, 회사에서는 직원이나 리더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자리에서 우리 스스로 이 자리와 권위를 얻은 것이라 착각하면 안 됩니다. 내가 누구보다 노력하고 고생하여 올라온 자리라고 하더라도,
우리를 그 자리에 맡기신 분은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사실을 망각하여 자리를 위해, 나의 권위를 위해, 나의 소유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 원한다면, 결국에 없어질 그 자리와 함께 우리는 삼켜져 없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 된 곳에 목숨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까?
제가 다시 한번 질문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누구로부터입니까?
동시에, 우리의 권위와 자리는 누구로부터입니까?
우리의 맡겨진 자리는, 오직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정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세상 권위같이 결국 썩어 없어질 것에 소망 두는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를 선택하사 이 귀한 직무를 맡기신 하나님의 뜻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때에 우리는 포도원에 방문한 종들처럼 세상에서 미움받고 상처받고 맞아 버려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포도원 농부들은 진멸되어 사라질 뿐이지만, 주인의 명령을 지켜 죽기까지 수고한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늘의 상을 결단코 잃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을 위해 그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그런 선한 주인이신 우리 하나님을 믿으며 오늘 하루도 세상에서 주인 된 마음이 아닌,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하나님의 종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