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욥기 30:1-15

◎ 본문: 욥 30:1-15
◎ 제목: 욥의 이유 없는 추락

1. 본문 개요
    a. 욥 30:1-15           하나님이 하시기에 품게 되는 희망


2. 본문 관찰
    a. 1-8절: 욥을 공격하는 사람들
    b. 9-15절: 그들의 공격을 받는 욥 자신의 처지


3. 적용
    욥은 오늘 본문 30:1-15을 통해 자신을 공격하는 이들이 어떤 존재이고 그들의 공격이 어떠한지를 비유를 통해 묘사합니다. 핵심적인 논지는 이것입니다. ‘악인들이 왜 자신을 공격하는지, 왜 욥 자신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 이유를 분석하고 원인을 찾으려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욥은 다시 한 번 자신의 고통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욥은 앞선 29장에서 ‘자신의 좋은 시절’이 하나님의 주권적 결단에 의한 은혜였듯이, 지금의 처참한 상황도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 결단 외에는 다른 설명을 가져다 붙일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고난에 대한 ‘이유’를 분석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결론에 다다른 겁니다.

    1절에서 욥은 ‘나보다 젊은 자’들이 자신을 비웃는다고 한탄을 합니다. 그들의 아비들은 욥이 보기에 ‘자기 양 떼를 지키는 개 중에도 둘 만하지 못한 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자신을 향하여 비웃는 자들이 매우 ‘미약하고 형편없는 존재들’이라는 말이 되겠지요. 1절에 이러한 욥의 견해는 2-8절의 말씀을 통해 과거에 지금 자신을 비웃는 ‘젊은 자’들이 얼마나 모자란 존재들이었는지에 대해 더욱 자세하게 묘사됩니다.

    1절에 ‘그러나 이제는’ 이라는 표현은 앞선 29장의 내용과 반대되는 내용이 이어질 것을 암시합니다. 앞선 29장에서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까닭 없는’ 은혜를 베풀었고, 그 은혜를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나누어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욥에게 존경을 표했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얼마 전까지 욥은 그 사회의 존경과 의지의 대상이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는 그 명예에 걸맞게 소외된 자들을 위해 나누어주고, 보호해 주고, 조언해 주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보다 젊은, 즉 ‘지혜롭지 못한 자’가 자신을 조롱한다고 합니다. 1절의 내용을 언 듯 보면 욥이 매우 교만하고, 오만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하지만 욥이 말하려는 의도는 ‘현재 자신을 괴롭히고 경멸하는 인간들이 형편없이 저급한 인간들이다.’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이들보다 더 낮은 욥의 현제 상태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더욱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거죠.

    2-8절은 지금 자신을 비방하는 ‘지혜 없는 자들’의 과거에 대해서 고발을 합니다. 먼저 2절에는 욥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만큼 그들의 힘이 약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력이라도 할 것도 없이 몰락한 자들이기 때문이지요. 이들은 3절에 극심한 가뭄과 굶주림으로 비쩍 마른 사람들이며, 폐허가 된 황무지,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에서 흙을 씹어 먹고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4절에서는 그들을 먹을 것이 없어서 나뭇가지와 나무뿌리로 겨우 연명하던 사람들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5절에서는 이들이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도둑이야!’를 외치며 쫓아내곤 했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6절에 사람들 사이에 살 수 없어, 도시에 살지 못하고, 험한 계곡이나 바위굴에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고 회고합니다. 마지막으로 8절에서 욥은 이들이 이름 없는 자들의 자식으로 고토에서 쫓겨난 난 자들이었다고 결론을 짓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욥을 지금 조롱하고 모욕하고 있는 자들은 단순히 사회적으로 하층민에 속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동네의 무리가 소리 질러 쫓아 낼 정도로 인격적인 면에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겁니다. 사회적 부랑아들과 같은 천민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욥이 비참한 것은 그런 자들에게서조차 멸시천대를 당하고 있다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의인에게 걸맞는 보상입니까? 이것은 결코 의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처사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욥처럼 고통당하는 자를 비난하고 모욕 주는 사람들이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하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누군가가 뒤로 처지는 것 같고, 몰락하는 것 같고 약한 모습을 보이기만 하면 그 사람이 나에게 이전에 잘 해 주었던, 못 해 주었던 간에 일단 끌어내리려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세상이 가지고 있는 얼굴이라는 겁니다. 이해관계에 따라 얼굴을 바꾸는 세상의 비정함이 온 세상에 널려 있다는 겁니다. 그런 사회 가운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욥의 호소를 우리가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는 겁니다. 욥이 당하는 고통은 저와 여러분에게도 충분이 있을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많이 심하고 덜 심하고의 문제이지 결코 ‘고난과 고통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자체가 늘 ‘비정함’이 존재하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절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형편이 어떻게 달라지느냐에 따라 얼굴과 태도를 싹 바꿀 수 있는 것이 세상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러하기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새벽에 우리는 ‘욥의 처지’를 그냥 먼 산 보듯이 보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구나!’라고 생각하며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적어도 ‘욥’이 가지고 있는 수준의 신앙 고백을 가지려면 내가 어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 볼 수는 있겠다는 겁니다.

    욥은 자신을 무기력하고 비참하게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붙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천한 존재들까지도 자신을 함부로 대하고 조롱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바닥’으로 끌어 내리신 것이 아니라면 내가 이렇게 까지 비참함의 자리에 내려할 수 없다는 사실을 믿은 욥처럼, 우리에게도 그 믿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은혜를 누리고, 잘 나가고, 시험만 치면 백점 받고, 사업에 손을 대기만 하면 대박을 치는 순간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도 오직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붙드시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믿음이 있어야만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고, 남들은 다 잘 되는 대도 손대는 것 마다 망하고, 시험은 쳤다 하면 꼴지이고, 정말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있는 건가라는 물음표 투성이인 순간을 지나가더라도 ‘하나님이 그래도 나를 붙드시고 있다.’는 고백이 가능해 진다는 겁니다.

    이 새벽에 다시 한 번 욥의 믿음을 마음에 붙잡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욥처럼 난데없는 재난에 빠지더라도, 자신이 누렸던 앞서 누렸던 축복과 전혀 연결점이 없는 현재의 비참함에 빠진다 할지라도 끝까지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세상은 늘 변절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을 향해 소망을 두는 것은 그야말로 바보 같은 선택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나의 헤아림의 영역 밖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나의 삶의 구석구석마다 다 간섭하시고, 나와 관련된 모든 일,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무조건적인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 믿음 가지고 매 순간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댓글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