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욥기 31:1-23

◎ 본문: 31:1-23
◎ 제목: 하나님은 다 아신다

1. 본문 개요
    a. 욥 31:1-23           욥의 무죄 선언(1)

2. 관찰
    a. 1-4절: 음욕에 대하여
    b. 5-8절: 속임에 대하여
    c. 9-12절: 간음에 대하여
    d. 13-15절: 종들에 대하여
    e. 16-23절: 가난한 자들에 대하여

2. 적용
    오늘과 내일 양일간 함께 살펴보게 될 31장은 욥의 마지막 발언의 종반부로 이른바 ‘무죄 서약’이라고 부르는 장입니다. 욥의 무죄 서약은 총 11가지로 나뉠 수 있는데, 그 중 오늘 본문 1-23절에서는 다섯 가지를 다룹니다. 1-4절은 음욕에 대하여, 5-8절은 속임에 대하여, 9-12절은 간음에 대하여, 13-15절은 종들에 대하여, 16-23절은 가난한 자들에 대하여 각 단락을 통해 자신의 무죄를 항변합니다.

    욥이 첫 번째로 언급한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죄는 ‘젊은 여성에게 눈길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절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두 눈과 언약을 맺었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지금 욥이 처음으로 제시한 자신의 무죄함에 대한 기준은 구약의 율법보다 마 5:28에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기준에 더 가깝습니다. 그는 4절에 하나님은 자신이 살아온 모든 길을 다 지켜보시고, 심지어 발걸음을 세시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신다고 확신하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무죄함에 있어서 확실한 증인이라고 못 박고 있는 셈입니다.

    두 번째로 언급한 죄는 ‘허위와 속임수’입니다. 5절에 ‘허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샤브’는 거짓말로 자신이나 상대를 속이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지키지 않은 맹세나 재판에서의 거짓 진술, 무가치하고 허망한 것, 거짓과 속임을 통한 재난과 파괴를 뜻하기도 합니다. 욥은 결코 자신의 발이 누군가를 속이려고 빨리 달려간 적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잠언 6.18절에 ‘빨리 악으로 달려가 는 발이라는 표현과 연결됩니다. 욥은 6절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공평한 저울에 달아 측량해 주시 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속임이라는 죄에 대해서 무죄하다는 사실이 반드시 입증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7-8절은 고대 근동 지역의 ‘무죄 서약’의 전형적인 형태를 따릅니다. ‘내가 만약 죄가 있다면, 이러 이러한 징벌을 받아도 좋다/받기를 원한다.’는 구조입니다. 그는 결코 눈에 보이는 것에 굴한 적도, 더러운 죄악에 손을 댄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합니다.

    세 번째로 언급되는 죄는 ‘간음’입니다. 9절에 ‘여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잇사’는 결혼한 여성을 지칭합니다. 그리고 ‘이웃’이라는 표현은 그 여성의 남편을 가리킵니다. 9절에 ‘숨어서 기다렸다.’는 의미의 동사 ‘아라브’는 전쟁 시 매복하는 것이나 타인에게 악을 행사하기 위해 숨어 잇는 것르 지칭합니다. 목적은 상대방에게 타격을 입히는 것이겠지요. 욥은 남의 아내에게 유혹을 당하거나 유혹을 느껴 그 남편에게 해를 가한 적이 없고, 그런 계획조차 세운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만약 그랬다면 10절에 자신의 아내가 남의 집 종노릇을 해도 좋다고 선언합니다. 10절의 표현은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물건 다루듯 한다고 불편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욥이 이런 표현을 한 것은 만약 자신이 타인의 혼인 관계를 파탄에 빠지게 만들었다면 자신의 혼인관계 역시 깨지는 것이 타당하다는 의미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네 번째는 종들에 대한 합당하거나 부당한 대우에 대한 부분입니다. 욥은 주인인 자신에게 옳고 그름을 따지려는 종들의 이야기에 귀를 닫은 적도 없고, 사태를 올바르게 바로잡지 않은 적이 없다고 13절에 말합니다. 그런데 욥이 자신이 종과의 관계에서 무죄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근거로 15절에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생각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나를 태 속에서 만드신 이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라는 표현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의 ‘자궁’에서 나왔기 때문에 하인이라고 해서 억울한 일을 당해서는 안 되고, 그에게도 올바른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수천 년 전 고대 이스라엘에 이러한 ‘인간관과 정의관’이 있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주인과 노예의 이분법을 뛰어넘어 죽음뿐만 아니라 출생에 있어서도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반성적 지혜’를 욥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욥은 ‘가난한 자들’에 관하여 자신은 죄를 저지르지 않았음을 강조합니다. 욥은 이들을 외면한 적이 없습니다. 욥은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외면한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21-22절을 통해 만약 자신이 손을 흔들어 불쌍한 사람들을 저리 가라고 내쫓았다면, 그 손만이 아니라 팔 전체가 없어지는 편이 더 낫다고까지 말합니다. 이 표현은 역시 예수님께서 ‘죄를 범한 손이나 발, 눈은 차라리 없는 게 낫다’고 말씀하신 것을 연상케 합니다.

    욥은 오늘 자신의 무죄함을 토로하는 내용을 보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욥은 하나님께서 다 아시는데 내가 허튼짓을 할 수 있겠느냐고 말하면서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합니다. 비유를 하자면 하나님의 눈은 이 세상 어느 곳도 사각지대가 없는 CCTV와 같다는 겁니다. 그런데 욥은 ‘그 CCTV 확인해 보시오.’라고 당당히 말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다음으로 자신은 약자를 괴롭히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부리는 종도 함부로 하지 않았답니다. 그는 모두가 똑같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결코 그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고까지 말합니다. 죽어가는 자들이나 가난한 자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고아를 갖다 기르고 과부를 챙겼습니다. 혼자만 먹고 고아의 배고픔을 외면하지도 않았다는 말이지요. 그러하기에 지금 욥이 당하는 고난은 그렇게 연약한 자를 도왔던 그가 받기에는 너무나 가혹하고 부당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한다고 거듭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재앙을 몹시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다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답니다. 그래서 그는 악인을 심판하시는 그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지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그 악을 행할 수 있겠느냐고 다시 한 번 자신을 변호하는 겁니다. 지금 자신이 당하고 있는 이런 고통을 당할까봐 두려워서 조심조심 살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을 정말 내가 당할 수 있다는 말인가? 부당하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오늘 욥의 무죄 선언을 바라보면서 두 가지의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먼저 주께서 다 아시기 때문에 더욱 우리의 삶을 경성해야 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며 조심해서 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인지 제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데요. 그 분이 자신의 책에 그렇게 쓰신 걸 본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홀로 있는 시간에도 좋은 그리스도인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혼자 있는 시간에도 여전히 ‘좋은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에도 하나님만은 우리를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혹 홀로 있는 시간에 은밀하게 벌이는 죄가 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그것은 행동일 수도 있고, 내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생각’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은 것은 회개하고 돌이켜야 함이 옳습니다.

    두 번째로 얻을 교훈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경건한 삶을 촉구하시지만 그것이 죄책감으로 일관되는 삶이되기를 원하지는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욥처럼 ‘무죄한 삶’을 살았음에도 고난당하는 인생일 수 있습니다. 나가 처한 현상만으로 지나친 죄책감에 빠진다면 우리는 절대로 일어설 수 없습니다. 나 스스로는 결코 죄를 이길 수 없지만, 죄와 사망 권세를 이기신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일어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조심하되 결코 죄책감으로 일관하지 않는 삶을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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