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욥기 31:24-40

◎ 본문: 31:24-40
◎ 제목: 경건한 살멩서 나오는 용기

1. 본문 개요
    a. 욥 31:24-40           욥의 무죄 선언(2)

2. 관찰
    a. 24-25절: 재물에 대하여
    b. 26-28절: 천체 숭배에 대하여
    c. 29-30절: 원수에 대하여
    d. 31-32절: 나그네와 난민에 대하여
    e. 33-37절: 죄를 숨기는 것에 대하여
    f. 38-40절: 땅에 대하여

2. 적용
    계속되는 무죄 주장과 무죄 서약으로 욥의 말이 마무리 되는 것을 봅니다. 후반부에는 여섯 가지의 무죄 서약이 나옵니다. 후반부의 무죄서약은 재물에 대한 것과 이웃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중점을 이룹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문제가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31장은 대부분이 ‘만일 내가 죄를 저질렀다면 이런 벌을 받아도 마땅하다.’는 형식을 취합니다. 인과응보의 법칙을 따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인과응보의 법칙은 ‘반쪽짜리’입니다. 왜냐하면 열거된 죄를 저지르지 않은 것에 대한 ‘보상’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기 때문입니다. 욥은 결코 자신이 이러한 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니 자신에게 그에 따른 ‘복’을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죄에 대해서는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하지만, 의로움과 무죄함에 대해 하나님이 응당 보상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욥이 하고 있는 ‘무죄 선언’은 자신의 무죄함에 대해 하나님께서 보상하지 않으신다 해도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계속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자 신앙 고백으로 보아야합니다.

    욥은 24절에 ‘금’으로 대표되는 재물에 대해 소망을 두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또한 25절에 자신이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을 때에도 자신은 그 재물을 의지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하기에 욥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산 자는 부자가 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부자는 곧 지혜자라는 일종의 세속적 번영신학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욥은 재물을 지혜에 뒤따르는 결과물이라고 여기지만, 동시에 재물을 탐하고 의지하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26-28절에서는 ‘천체’를 숭배하는 죄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26절에 ‘해가 빛남과 달이 밝게 뜬 것을 보고’라는 표현은 천체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것이 아니라 해와 달 등의 천체를 숭배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성경은 ‘일월성신’을 숭배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의 왕과 민족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암암리에 행하는 관습이 있었지요. 욥은 결코 자신이 그런 죄를 짓지 않았음을 강조합니다.

    29-30절은 ‘원수에 대하여’ 죄를 짓지 않았음을 또한 강조합니다. 욥은 자신을 미워하는 자가 망하는 것을 보고 기뻐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적대적인 자들에게 나쁜 일이 발생했다고 해서 쾌재를 부른 적이 없다는 말이지요. 규범적 지혜에 있어서 ‘인과응보 사상’은 원수가 자신의 잘못에 대한 보복을 받는 것을 긍정적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욥의 관점은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미움으로 되갚아 주기를 즐기지 않습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원리를 탈피하여 ‘반성적 지혜’를 욥이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1-32절은 ‘나그네와 난민’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죄를 범하지 않았음을 말합니다. 31절에 ‘내 장막 안에 거하는 사람’ 중 자신이 주는 고기에 배부르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32절에 ‘나그네’로 번역된 ‘게르’라는 히브리어가 이어서 나오는 것을 보면, 지금 욥이 말하는 ‘장막 안에 거하는 사람’들은 오갈 데 없는 나그네나 난민으로 그 의미가 좁혀집니다. 성경은 자기 지역을 지나가는 타지인들을 극진히 대접하도록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욥은 자신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밖에서 자지 않게 했고 항상 아무나 들어올 수 있도록 대문을 열어두었음을 강조합니다.

    33-37절은 ‘죄를 숨기는 죄’를 저지르지 않았음을 시사 합니다. 33절에 ‘다른 사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담’입니다. 그래서 ‘고유명사 아담’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즉 창세기 3장에 언급되는 아담이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숨은 것’에 빗대어 욥 자신은 숨기거나 가릴 만한 잘못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는 어느 누구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32절에서처럼 자신의 대문을 항상 열어놓을 수 있었고, 34절에 언급하는 바 문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 마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대답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랄 수 있는 이유는 35절의 내용처럼 그가 아담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법정 앞에서 숨길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음을 강력하게 말합니다.

    마지막 죄의 문제는 38-40절에 나타나는 바, 땅에 관한 겁니다. 욥은 자신이 부당하게 땅을 착취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다른 이의 땅에서 나온 소출을 무단으로 점유하거나 그 땅 주인으로 하여금 죽음에 이르게 한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친구들은 욥의 악행이 ‘재물숭배, 황금숭배’라고 지적하면서 금을 돌 보듯 하라고 했지만, 그는 순금과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다고 자신합니다. 돈 때문에 약자를 학대하지도 않았고, 돈을 아끼려고 나그네의 필요에 눈감지도 않았습니다. 남의 땅을 가로채지 않고, 그 대가를 지불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재물에 관하여 하나님 앞에 떳떳했습니다. 심지어 해가 빛남과 달이 밝게 뜬 것을 보고 자기 손에 입맞춤하기만 했어도 벌을 달게 받겠다고 할 만큼 욥은 조심스럽게 그리고 철저하게 자신의 경건을 유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마땅히 미워할 사람도 미워하지 않았답니다. 죽음을 저주하는 줄 알면서도 그를 향해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상 숭배하지 않았습니다. 악을 숨기거나 악을 품에 감추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단 한순간도 큰 무리와 여러 종족의 수모가 두려워서 대문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잠잠한 적도 없었습니다. 늘 용감하게 대처했습니다. 그는 ‘내가 아무리 무언가를 숨긴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다 아신다.’는 기본적인 신앙의 태도가 있었기 때문에 늘 정직했습니다.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결국 세 친구들을 향하여 ‘고발할 테면 고발해 보라!’고 으름장을 놓는 듯 합니다. 그러면 전능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응답하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자기의 죄가 혹 드러난다면 차라리 죽겠다고 까지 합니다. 그는 자신이 결코 지금 내가 당하는 이런 고난에 처할 만큼 악한 삶을 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친구들은 그의 고난으로부터 죄를 추측했지만, 욥은 그의 삶과 현재의 고난의 연관성을 찾지 못해 오히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가 있다면 고발해 보라고 할 만큼 사람 앞에서 투명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욥의 모습을 보면서 깨닫습니다. 결국 욥에게 대답하실 수 있는 분은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지금 욥은 ‘친구들’에게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 하나님 들으시라고 이 ‘무죄서약’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욥은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만이 자신에게 대답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답해 주실 것라고 믿으니 더욱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 새벽에 내 문제는 결국 하나님만이 답을 주실 수 있다는 믿음으로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참된 용기는 ‘내면의 탄탄함’에서 말미암습니다. 그리고 그 내면의 탄탄함은 ‘하나님 앞에서 투명한 삶’을 살아낼 때에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욥의 당당함을 배우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늘 하나님 앞에 투명한 삶을 살아냄으로 어떤 고난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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