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본문: 눅 11:37-54
◎ 제목: 율법의 무게에 짓눌린 위선의 신앙
1. 본문개요 및 관찰
1) 37-41절: 바리새인의 외식을 꾸짖으심
2) 42-44절: 바리새인들을 향한 세가지 ‘화’
3) 45-54절: 율법교사들을 향한 세가지 ‘화’
A. 율법교사들을 향한 ‘화’ 선포(45-52절)
B.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저항(53-54절)
2. 적용
우리는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새인을 보면서 그들이 예수님께 거듭 책망 받는 부류이기에 별 것 아닌 존재들이라 치부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통달하였고 그 율법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매우 세밀하고 철저하게 자신을 다스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자타 공인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그들을 향하여 ‘화’를 쏟아 놓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화를 쏟아 놓으신 이유는 다름 아닌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놓쳐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 가르침을 듣는 이 중에 아마도 바리새인들이 섞여 있었던 듯 합니다. 그러다가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 자리에 초대합니다. 그런데 38절에 예수님은 잡수시기 전에 손을 씻지 않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식사 전에 정결을 위해 손을 씻는 결례를 지켜 왔는데, 예수님께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대하자 그를 초대한 바리새인이 놀라고 당황하게 됩니다.
이런 모습을 보자 예수님께서는 39절에 그 바리새인을 보면서 당시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책망하십니다.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고 지적하십니다. 예수님은 식사를 비롯한 일상 전반에서 겉모습의 정결에만 집착하는 바리새인의 행실에 대하여 직격탄을 날리신 겁니다. 겉은 깨끗했지만, 속은 부정이 가득한 그들의 모습을 지적하면서 그들의 표리부동한 삶과 신앙을 꼬집으신 겁니다.
예수님은 외적인 종교행위와 정결법을 철저히 지키는 바리새인들의 겉모습에 속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속에서 끊임없이 탐욕과 악독을 끊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신앙생활이 외적인 행위와 형식에 치우친다면,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참된 신앙은 내적인 경건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며, 예배와 일상의 삶을 통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삶 속에서 드러내는 데 초점 맞추어야 함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바리새인들은 왜 이토록 외식에 빠지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율법의 무게를 더해 사랑의 본질을 잃은 규율로 무겁게 짐을 지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 속에는 은혜가 사라질 수밖에 없는 거죠. 형식적인 규율이 아니라 따뜻한 긍휼 가운데 진리는 빛이 난다는 사실을 붙잡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참된 경건은 자신을 높이는 율법의 행위보다 내면의 순결함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늘 나의 내면을 단장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2-44절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향하여 세 가지 ‘화’를 선포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첫 번째 ‘화’는 겉만 그럴싸하게 포장한 바리새인들의 신앙 행위와 관련됩니다. 그들은 ‘박하, 운향, 채소’의 십일조를 철저히 바쳤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내면이 정결해진다고 믿었지요. 하지만 예수님 보시기에는 그저 겉만 깨끗하게 하는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내면에 공의는 없었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빠져있음으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화’를 선포하셨습니다.
두 번째 ‘화’는 높은 자리에서 존경과 섬김 받기를 좋아하는 태도를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율법의 권위를 사유화해서 사람들에게 존중과 명성을 향유하였습니다. 회당의 높은 자리를 탐하고 사람들이 붐비는 시장에서 인사 받기 바빴습니다. 세 번째 ‘화’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평토장한 무덤’으로 비유하십니다. 율법에서 사체와의 접촉은 부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산 자가 부정을 피할 수 있도록 무덤에는 반드시 표시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평토장한 무덤은 ‘표시가 없는 무덤’입니다. 그래서 무덤인지 모르고 그 위를 지나가면 결과적으로 부정하게 됩니다. 바리새인은 속이 부정한데 많은 사람이 모르고 따르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며 정결로 인도한다고 자부하던 그들이 사람을 부정에 빠뜨리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화’ 선언을 듣고 있던 한 율법교사가 불쾌감을 표시합니다. 율법교사도 바리새파에 속해 분파의 규율을 연구하고 만들어내는 사람, 즉 ‘서기관’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모욕으로 받아들인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46-52절까지 율법교사들이 자신들도 지키기 어려운 율법의 요구를 사람들에게 짐 지우고 있다고 꼬집으십니다. 먼저 진실한 삶의 본을 보이지 않으면서, 사람들에게 율법대로 살라고 강제한 것이 바로 예수님으로부터 ‘화’의 선언을 하게 만드는 ‘첫 번째’ 이유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교사들에게 두 번째 ‘화’를 선포하신 이유는 그들이 선지자들을 죽인 조상들의 잘못을 반복하며, 심지어 죽임당한 선지자들의 무덤을 꾸미는 행위를 통해 조상들의 살인에 대한 증인을 자처하는 셈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벨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모든 의로운 피가 이 세대에 요구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 ‘화’이자 율법교사들을 향한 세 번째 ‘화’의 선언을 통해 예수님은 그들이 지식의 열쇠를 가졌다고 말하면서, 그들이 열쇠를 가지고 문을 열어 들어가지도 않고, 들어가려는 자들을 막고 있다고 책망하십니다. 그들의 외식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는 말이지요.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복잡하게 해석하여 불필요한 종교적 규정에 갇혔습니다. 율법학자들은 남의 어깨에 무겁게 짐을 얹어 불필요한 부담을 주었습니다. 율법의 본질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것인데, 율법교사들은 율법을 도구로 삼아 사람들을 억압하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들었다는 말이지요. 율법의 외적인 기준만 강화할 때, 속은 비고 참된 의는 사라집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과 은혜의 길에서 떠난 경건은 헛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와 사랑의 본질을 잃은 채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이 위선적인 종교 생활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외적 규율이나 형식만을 강조하고 본질을 잃어버리게 되면 바리새인들의 전철을 밟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경건해 보여도 실제로는 하나님과 멀어져 있고 은혜는 사라지고 속은 텅 비어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겉이 아니라 내면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자리 잡아야 합니다. 매 순간 참 경건의 신앙을 통해 하나님께 내가 먼저 나아가고, 또 다른 이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