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눅 13:22-35

◎ 본문: 눅 13:22-35
◎ 제목: 구원의 문 안에 들어가려면

1. 본문개요 및 관찰
    1) 33-30절: 하나님 나라 참여
        A. 좁은 문 비유(22-24절)
        B. 먼저 된 자, 나중 된 자(25-30절)
    2) 31-35절: 선지자의 죽음과 예루살렘의 최후
        A. 선지자를 죽인 예루살렘(31-33절)
        B. 예루살렘의 최후(34-35절)

2. 적용
    ‘구원받아 천국 간다.’ 마치 공식과 같은 이 문장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리입니다. 구원받으면 천국 가는 것, 맞죠. 틀린 말 아닙니다. 하지만 ‘구원받아 천국 간다.’라는 이 문장은 구원이 ‘종착역’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반드시 ‘구원의 여정’을 지나가게 하십니다.

    구원의 여정은 결코 쉽거나 편하지만은 않습니다. 복과 형통을 늘 만나는 것도 아닙니다. 길은 좁고 협착하여 여간 위험하고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 끝에 생명의 떡이 차려진 잔칫상이 기다리고 있음은 믿어 의심치 않기에 우리는 포기할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천국 백성으로서 이 세상 가운데에 믿음의 여정에서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 일행은 각 성과 마을을 지나갑니다. 점점 예루살렘에 가까워지고, 회개할 기회의 시간도 단축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때 또다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그 사람의 질문은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까?”입니다. 이렇게 질문하는 배경은 두 가지로 추측을 해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성과 마을을 돌며 진행해 오신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무리의 무지와 적대적 반응 때문에 이런 질문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예수님께 질문을 한 어떤 사람이 보기에 성경에 구체적으로 언급이 되어 있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구원을 위한 긍정적인 반응이 너무나 미비하게 느껴졌다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했다는 추측입니다.

    또 다른 추측은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본문 직전인 눅 13:18-21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에서 지극히 작은 겨자씨와 소량의 누룩을 하나님 나라에 비유한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께 하는 질문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23절의 ‘어떤 사람’의 입장에서 그가 경험하고 이해하는 하나님 나라는 너무 작게 느껴진 거죠. 그가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전파하실 때 무리가 획기적으로 반응하며 회개를 동반한 적극적인 동참을 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거죠. 그래서 이 사람은 ‘적은 수만 구원을 받는 겁니까?’라고 질문을 한 겁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질문에 대해 24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권면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소수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정해 진 것은 아님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길을 따르는 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의 문은 십자가의 길을 가는 자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받음은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선물’인 동시에, 구원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운동선수가 시합하듯, 순종을 위해 힘쓰고 노력하는 삶이 같이 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야고보 사도가 말한 ‘행함이 따르는 구원’입니다. 구원의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열려 있는 것은 아니고 또 언제든지 닫힐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25~30절을 통해 이러한 구원의 원리를 ‘집 주인의 비유’로 보다 명확하게 가르치십니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는 밖에서 아무리 열어 달라고 두드린다 할지라도 돌아오는 대답은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모른다.’라는 거죠. 그때 사람들은 억울해하며 주인과 함께 먹고 마시고 가르침 받았던 관계를 호소할 것이지만, 주인은 그들에게 ‘행악하는 모든 자들’이라 말하며 나를 떠나가라고 할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을 하십니다.

    무엇을 보여줍니까? 같은 공동체에 속하고 말씀을 들었다고 해서 구원받은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혈통도 구원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오직 좁은 길을 가는 자, 듣고 행하는 자가 구원에 이릅니다. 천국 문에 들어갈지는 믿음을 따르는 순종의 행위로 입증됩니다. 믿는다고 자부하며 안심하던 이들, 말씀을 지키고 있다고 착각한 이들, 종교적 행위로 순종을 대신하려는 이들은 크게 당황할 것입니다. 이 새벽에 각자의 ‘구원’을 돌아보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안이한 확신보다 두렵고 떨림으로 걷는 것이 지혜입니다. 늘 좁은 문 좁은 길을 걷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비유와 가르침이 끝나자 어떤 바리새인이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다는 소문을 전달합니다. 아마도 이런 소문을 전달한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호감을 느낀 소수의 바리새인으로 추정됩니다. 예수님은 이 말을 듣자마자 헤롯에 대하여 ‘여우’라고 평가하십니다. 여우는 ‘영리함과 약삭빠름’의 대명사입니다. 제아무리 막강한 권세로 예수님의 운명을 결정지으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소관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당신의 길을 가겠다고 밝히십니다. 목적지인 예루살렘에서 당당히 죽음을 맞이할 것을 예고하시면서 말이지요.

    33절에 예수님께서는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 죽는 법은 없다고 아시면서, 결국 십자가에서 죽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므로 비극이 아님을 강조하십니다. 다만 이런 악행을 자행하는 예루살렘의 운명이 가련할 뿐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자들을 신성 모독과 배교로 규정하여 처형하는 역설로 가득하였습니다. 종교 권력에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반하는 악행을 저지른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짜 비극이 자기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운명이기 때문에 그들을 모으려 하셨지만, 무지와 오해, 집착과 욕심으로 거부당하셨습니다. 그러함에도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셨고, 의연하게 좁은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도 그 사실을 분명히 하십니다. 예수의 제자라면 마땅히 세상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좁은 길 걷는 것이 천국 가는 길임을 인지하고, 예수님 따라 그 길을 걸으라고 말이지요.

    ‘좁은 길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이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이것이 구원의 끝에 이르는 길임을 이 새벽에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전대중앙교회 공동체를 저와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것은 그 좁은 길을 홀로 가지 않고, 즐겁게 동행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더불어 ‘주의 영이 함께 하시니’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요. 천국 가는 그 길이 좁고 험할지라도 매 순간 나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며 힘차게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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