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래 전도사 / 누가복음 15:11-32

본문 : 누가복음 15:11-32

제목 : 죄인을 살리는 제자가 되려면

개요 :
11-19
절 둘째 아들의 떠남과 돌아옴
   A. 아버지를 떠난 비극(11-16)
   B.
아버지 집으로 돌이킴(17-19)
20-24
절 아버지의 환대: 영접과 잔치
25-32절 맏아들과 아버지
   A. 맏아들의 분노(25-28a)
   B.
아버지의 설득(28b-32)

본문연구

 오늘도 기도의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 은혜 충만한 하루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은 수요심야기도회가 있는 수요일입니다. 함께 기도의 자리에 나오셔서 찬양과 말씀, 기도로 성령 충만한 시간되길 소망합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은 배고픔에 빵을 훔치던 장발장이 변화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출소 후 은촛대를 훔치던 장발장은 미리엘 주교의 따뜻한 용서와 자비로 변화되어 새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도, 변화된 장발장에 의해 감화되어 새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오직 장발장의 과거를 아는 자베르 경감은 결코 변하지 않고, 자기 원칙과 신념을 고수하다 자살로 비참히 생을 마감합니다.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사랑과 희생, 용서와 구원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장발장은 법보다 인간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며, 오직 사랑과 자비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15장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방금 우리가 나눈 레미제라블과 유사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용서받은 둘째 아들과 장발장 그리고 화가 난 첫째 아들과 자베르 경감 또, 아버지와 미리엘 주교가 그것입니다. 하지만 돌아온 탕자 이야기가 레미제라블보다 시기적으로 훨씬 앞서기 때문에, 사람들은 레미제라블이 누가복음 내용에서 영감 받은 것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합니다.

 

 오늘 누가복음 15장 본문에서 예수님은 잃은 양과 드라크마를 찾는 비유에 이어, 세 번째로 잃은 아들을 되찾는 비유를 설명하시는데요. 11절에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 겁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12절의 아버지는 어떤 주저함 없이 살림을 후하게 나눠 줍니다. 둘째는 신이 나, 받은 유산을 며칠 만에 정리하여 먼 타국으로 갑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돈 쓰는 재미가 있습니다. 낭비는 멈출 줄 모릅니다. 아버지 유산을 허랑방탕히 사용하는데, 모두 없애 사라질 때까지 모르는 겁니다. 그리고 14절에, 그 외국 땅에 하나님이 보내신 큰 흉년이 듭니다. 탕자는 그 흉년이 들고 비로소 자기 궁핍함을 깨닫는 것이지요. 이렇게 죄는 사람의 눈을 멀게 합니다. 욕심과 탐심에 사로잡혀, 죄의 노예가 되어 그 삶을 서서히 망가뜨립니다.

 

 그런데 아직 버틸 만 했는지, 탕자는 돌아갈 생각이 없습니다. 15절에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는데요.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겨우 얻게 된 직업은 바로 돼지 치는 일입니다. 이것은 비록 유대인에게 부정하게 여겨지는 일이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돼지라도 치면서,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려 합니다. 하지만, 먹을 것이 없어도 너무 없었습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먹으려 하지만, 그것조차 주는 이 없습니다.

 

 결국 탕자는 죽음 직전까지 간 상황에 이르러 회개하게 됩니다. 17절에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그는 자기 집 종보다 못한 처지에서 배고픔으로 죽게 된 것을 깨닫습니다.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살 길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18-19절에 자기 죄를 고백하며 품꾼의 하나가 되기로 하고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이제껏 나온 아들의 결정 중 가장 잘한 결정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가장 잘한 결정, 아버지께로 돌아갈 결정을 내리며 살 길 소망합니다. 탕자처럼 겨우 죽기 직전에야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어느 상황 어떤 환경에 있든지 그 자리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늘 찾아가길 소망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소망과, 평안이 있을 줄 믿습니다. 하늘 아버지를 언제나 기억하며 풍요로운 인도하심 가운데 거하는 성도님들 되시길 소망합니다.

 

 그리고 20절의 아버지는 먼 거리에서부터 그를 측은히 여기고, 달려가 입 맞춥니다. 그리고 아들이 더 변명하지 못하게 막고, 좋은 옷을 입히고 잔치를 엽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죄인 구원하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회개함으로 주님 앞에 나아와 구원받기 원하십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의 인간적 판단과 경험을 넘어 은혜와 자비로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인을 용서하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맏아들입니다. 28절에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맏아들은 자기 행위와 자기의 옳고 그른 판단 가운데, 도저히 아버지 행동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악한 죄인을 위해 가진 것을 낭비하는 아버지가 너무 불공평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정작 맏아들이 몰랐던 것은 31절 하반절에 나타납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모든 것이 다 그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몰랐고 누리지도 못했습니다. 아버지를 오해할 뿐이었습니다. 결국 집나간 둘째처럼 그도 아버지께 받은 온갖 수혜를 알지 못하고 불만과 정죄를 일삼았습니다. 불쌍한 동생에 대한 긍휼과 자비가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이 이야기를 듣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바로 이 맏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맏아들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구원이 필요한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비유를 통해 세리와 죄인들을 하나님 나라에 참여시킬 뿐만 아니라, 또, 잔치 밖에 있는 종교 지도자들도 초청하고 계십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에서 확장하여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통해, 죄인의 회개와 그것을 기뻐하는 아버지 하나님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귀한 일인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죄된 세상에서 판단만을 일삼는 바리새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살려주고 세워주는 아버지 같은 자 되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자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아버지 마음을 전하는 우리 성도님들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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