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눅 16:14-31

◎ 본문: 눅 16:14-31
◎ 제목: 버리는 제자

1. 본문개요 및 관찰
    1) 14-18절: 율법 그리고 하나님 나라
        A. 바리새인들을 향한 책망(14-15절)
        B. 율법과 하나님 나라(16-18절)
2) 19-31절: 부자와 거지 비유
        A. 땅에서의 부자와 거지(19-22절)
        B. 음부의 부자와 아브라함의 대화(23-26절)
        C. 부자의 간청과 아브라함의 대답(27-31절)

2. 적용
    누가복음의 별명 가운데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음서’이 있습니다. 그에 걸맞게 부와 가난의 문제에 대한 누가의 관심은 집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강렬한 선언 이후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제자도의 가장 중요한 척도로서 ‘가난한 이들을 향한 관심’과 ‘소유하는 것에 있어서의 경계’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참으로 빈부의 격차, 양극화의 문제가 극에 달해 있는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는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는지 함께 나누어 봅시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14절에 나타난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비웃음’입니다. 그들은 돈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기득권자들과 잔치를 즐기며 사회적 명성에만 관심 가질 뿐 철저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은 외면하는 것이 바리새인들의 특징입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비웃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일관된 거절을 간파하시고는 외식과 부정을 직설적으로 꼬집으십니다. 15절에 그것이 잘 나타나 있는데요. 바로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다.”라는 지적입니다.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재물을 숭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가증스럽다는 것은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돈 사랑함이 다름 아닌 율법이 금지하는 우상숭배라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은 외적으로는 매우 경건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내면은 탐심으로 가득했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가산을 삼키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알량한 부를 의의 증거로 삼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오만으로 가득하여 주님의 말씀을 비웃었습니다. 갈릴리 출신에 대한 조롱과 멸시는 그들의 뿌리 깊은 교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탐심도, 교만도 하나님 보시기에 우상 숭배와 진배없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내면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에겐 감출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중심을 다 알고 계십니다. 매 순간 탐심과 오만을 조심하고, 깨끗한 양심과 정직한 겸손으로 하늘의 것을 상속받기를 사모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한편으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비웃은 이유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들이 알고 있는 율법의 가르침과는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16-18절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어떻게 율법과 연관성이 있는지를 설명하십니다. 16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선지자가 요한의 때까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성경 전체’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즉, 옛 언약에 속해있는 시대적 구분의 기준점이 다름 아닌 ‘세례 요한’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옛 시대에서 세례 요한은 그래서 가장 큰 자이지만, 새 언약의 시대에서는 가장 작은 자인 셈입니다.

    17절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역을 통해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쉽다는 표현을 통하여 새 언약은 옛 언약을 버림이 아니라 완성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경고하십니다. 옛 언약의 시대에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며 의롭다고 자랑하면서 속으로는 재물을 사랑하는 우상숭배에 붙들려 있다는 겁니다. 중심을 보시는 주님의 나라는 마음속 허위와 위선을 모조리 드러냅니다. 스스로 옳게 여기며 사람 중에서 높임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배제되고, 복음에 반응하여 회개하고 낮추는 이는 그 나라에 들어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새벽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향해 물으십니다. 우리는 과연 어느 시대에 머물고 있는지 말이지요.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을 좇아서 살아간다고 말하지만,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인 사고 방식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볼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 하고 있다면, 우리가 바로 바리새인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겁니다. 예수께서 이루신 새 언약의 그늘 아래 더욱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붙잡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이어지는 19-31절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로 예수님께서 가르침을 이어가십니다. 부자는 화려하고 부요한 삶으로 돈을 사랑하고 섬기는 인생의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와 정반대로 거지 나사로는 더러운 옷에 온몸이 상처투성이입니다. 부자가 집 안에서 향락을 즐길 때,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얻어보려고 문밖에 있습니다.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구걸했지만 부자의 세상에서 그는 무참히 쫓겨납니다. 아무런 돌봄도 없이 문밖에 버려진 나사로에게 개들이 와서 상처를 핥으며 괴롭힐 뿐입니다. 그야말로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 둘의 운명은 죽음으로 반전되어버립니다. 나사로는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 드나,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당합니다. 음부의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던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 그의 손가락 끝에 물을 적셔 자기 혀에 떨어뜨려 달라고 간청합니다. 극심한 고통에서 부자는 절실히 작은 긍휼을 구하지만 외면당합니다. 아브라함은 부자를 향하여 ‘네가 이생에서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내세에서 부자는 괴로움을, 나사로는 위로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재물로 친구를 사귀지 못한 부자에겐 손가락에 물 한 방울 찍어줄 친구가 없었습니다. 부자는 가족을 위해 나사로를 보내줄 것을 구하지만, 아브라함은 이마저 거절합니다. 이미 말씀을 통해 충분히 기회가 주어지고 있기 때문에, 부자의 가족들도 그 말씀을 통해 주어지는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 말씀에 귀 기울여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음에 따라 죽음 이후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거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이 땅에서의 삶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이를 외면하고 자기 이익만을 위해 산 자들, 돈이 그리고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어 있는 자들을 위해 마련된 천국은 없습니다. 탐심과 교만, 음란을 숭배한다면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언제나 믿음은 순종으로 이어져야 하며, 열매 있는 믿음만이 구원에 이른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주를 위해 기꺼이 버리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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