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래 전도사 / 누가복음 19:1-10

본문 : 누가복음 19:1-10

제목 :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

개요:
1-4절 삭개오의 등장
   A. 세리장, 부자 삭개오(1-2)
   B.
키가 작은 삭개오(3-4)
5-7
절 삭개오와 예수의 만남
8-10절 잃어버린 자의 구원
   A. 삭개오의 반응(8)
   B.
예수의 반응(9-10)

 

본문연구

 오늘도 기도의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 은혜 충만한 하루되시길 소망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하루를 열 때 하나님께서 부어주실 은혜와 평강이 충만할 줄 믿습니다. 누가복음을 읽다보면, 다른 복음서와 달리 유독 ‘부자’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 중 오늘 읽은 삭개오 이야기는 모든 성경을 통틀어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삭개오 본문에서 누가는 특히 재물에 대한 삭개오의 태도변화를 강력한 회심의 증거로 제시하고 있는데요. 그래서 어떤 신학자들은 이것을 보고, 재물에 대한 우리 마음과 태도가 바로 그 사람의 ’구원’과 ‘제자도’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앞장 누가복음 18장 25절에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불가능해 보이는 재물이라는 바늘귀는 과연 어떤 사람이 통과할 수 있을까요?

 

누가복음에서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가”는 주제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앞선 어린아이, 가슴을 치던 죄인 세리, 맹인 그리고 오늘 삭개오까지 어떤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합당한지 누가는 여러 예시들을 통해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1절에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했습니다. 신약시대 여리고는 구약시대 여리고와 달리, 헤롯대왕 때에 많은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특히 헤롯대왕은 마을 부근에 수로, 연못, 웅장한 겨울 궁전, 극장 등을 짓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발달된 도시에서 삭개오는 바로 로마의 하수인이 되어 커다란 부를 쌓은 것입니다.

 

또 2절에 세리장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이것은 세리들의 우두머리란 뜻으로서, 그가 그 세계에 오랫동안 있었던 것을 알려줍니다. 비록 외적으로 키가 작아, 어릴 때부터 무시 받던 사람이었지만, 그는 비상한 머리를 가지고 세리의 세계에서 그 능력을 인정받아 세리장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리장 삭개오는 어쩔 수 없는 매국노로서 자기 동족들로부터 온갖 멸시와 비난을 받아야만 했을 겁니다. 어렸을 때는 키가 작아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했는데, 세리가 된 어른부터는 이제 죄인취급을 받으며 평생 정죄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에는 평생에 늘 채워지지 않는 큰 구멍이 있었습니다. 이제 물질적으로 성공하여 큰 부자가 되고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었지만, 그의 마음에는 늘 허전함이 있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그의 삶을 통해, 물질이 가진 한계를 보게 됩니다. 물질이 많으면 정말 모든 것이 가능한 것처럼 보이고, 우리 영혼을 충만히 채워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얼마 전 삼성 부회장이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언론에서는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로 인한 심정지가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하고 있습니다. 또, 재벌 2세, 3세, 유명 가수가 갑자기 세상을 떠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에게 물질이 부족해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큰 재물을 갖고 있지만, 그것이 그들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영혼의 문제, 영생의 문제를 재물이 결코 해결해 줄 수 없었습니다.

 

한편, 삭개오도 이들 같은 부자였는데, 그에게 한 가지 중요한 일이 일어납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영혼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리고에 오신다는 소식을 들은 겁니다. 그는 즉시 그 복음을 듣고 3절에,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돌무화과나무, 뽕나무 위까지 올라가 예수님 얼굴 보기를 갈망했습니다. 여러분, 중년의 나이에, 세리장이고 큰 부자 남성이 직접 뽕나무 위로 올라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큰 갈망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자신의 문제, 부와 지위가 해결해 줄 수 없는 영혼의 문제를 해결해주실 분이라는 영적 목마름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깨닫게 됩니다. 과연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사람의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향한 영혼의 목마름을 갖고 있는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4절 하반절 말씀을 보면 놀랍게도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하고 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를 보기를 원했는데, 이제 예수님이 삭개오를 보십니다. 거꾸로 예수님의 시선에서, 그는 키가 작은 자신이 잘 보이도록 나무 위로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그와의 만남은 얼핏 보면 우연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모든 일이 주님의 주권 아래 일어난 일임을 우리는 이어지는 5절 말씀에서 보게 됩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아멘.

 

예수님께서 5절에서 그곳에 이르사 그를 친히 바라보시고 삭개오야 이름을 부르십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그 이름을 주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 모든 삶의 아픔과 영혼의 갈망을 이미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십니다. 이에 대한 삭개오의 반응은 어떤 반응입니까? 앞서 18장에 근심하여 떠난 부자 관원과 달리, 삭개오는 기쁘게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청하고 환영하였습니다. 여기서 그가 주님을 모셨다는 것은 단순한 초청 이상입니다. 내 삶을 완전히 공개한다는 뜻이고, 내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그 분에 의해 점검 받고 혹시 틀린 것이 있다면 기꺼이 고칠 각오를 한다는 의미입니다. 나를 포기하는 일이지만 하나님 나라를 얻게 됩니다. 우리는 삭개오처럼 기쁘게 예수님을 내 마음의 구주로 영접하고 있습니까? 기꺼이 내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점검받고 기꺼이 고칠 각오를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모신 삭개오는 이어지는 8절에서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냅다. 자기 지위를 이용해 빼앗은 것은 보상하고, 재산의 절반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쓰겠다고 합니다. 이제 지금껏 그의 마음을 지배해온 우상이 예수님에 의해 쫓겨나는 순간입니다. 단순히 속죄하고 앞으로 잘 살겠다는 결심 이상으로 주님만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모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회심’이라는 것을 누가복음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삭개오의 결단은 새 주인 아래 사는 이에게 어울리는 고백입니다. 이제 그 삶의 진짜 주인이 물질이라는 우상에서 예수님으로 바뀌었기에 가능한 고백입니다. 앞서 자신은 변하지 않고 영생만 취하려 했던 부자 관원과는 다릅니다. 이렇게 삭개오는 주님을 진정으로 영접하여,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렇게 예수님을 내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모셔서, 변화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내 삶의 구석구석 그분을 초청하고 그분의 주권을 선포할 때. 우리 영혼의 문제, 영생의 문제가 온전히 해결될 줄 믿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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