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본문: 눅 19:11-27
◎ 제목: 오해가 불충으로
1. 본문개요 및 관찰
1) 11-27절: 열 므나 비유
A. 비유로 말씀하시는 목적(11절)
B. 왕위를 받으러 간 귀인(12-14절)
C. 충성된 종과 약한 종(15-23절)
D. 주인의 심판(24-27절)
2. 적용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9에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라고 제자 ‘빌립’을 나무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 중에 가장 무서운 말입니다. 주를 따르면서도 주의 생각은 따르지 않는, 주의 나라를 사모한다고 하지만 결국 ‘내 나라’만 꿈꾸다가 끝날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보고 있는 ‘열 므나 비유’를 새겨들어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의 ‘이 말씀’은 악명높은 세리장 삭게오의 회심 장면에서 예수님이 삭게오를 향하여 구원을 선포하고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함이다.’라는 가르침을 선포하는 그 상황을 말하는 겁니다. 삭게오는 세리 중에서도 장이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그는 가장 악랄한 매국노입니다. 그런데 그런 삭게오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런 상황을 맞이하고, 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분이 예루살렘에 입성하기만 하면 다윗의 나라 재건이 곧 실현될 것이라는 기대가 싹트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 헤롯과 빌라도도, 대제사장 가야바도 모조리 폐위되고 독립을 방해하는 군대도 섬멸될 것이라 여긴거죠. 하지만 이러한 기대는 성급하고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열 므나 비유’를 통해 설명하십니다.
12절에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기 위해 먼 길을 떠납니다. 여기에서 왕위를 받는다는 것은 ‘분봉왕’의 자격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헤롯 대왕이 죽자 그의 아들 아르켈라오가 ‘왕권’을 받기 위해 로마로의 긴 여정을 떠난 것이 역사 가운데 나타난 구체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아르켈라오는 당시 지배국인 로마 정부로부터 ‘분봉왕’으로 비준을 받지 못하면 유대에서 왕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14절을 보니까 분봉왕의 자격을 얻으려는 귀인에 대해 그 백성들은 그를 미워하여서 이 귀인 몰래 사자를 보내어서 ‘이 사람이 우리의 왕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청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역사적 사실에 기반합니다. 아르켈라오가 분봉왕의 비준을 받으려 떠남과 동시에 아르켈라오의 인기가 낮다는 이유로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왕으로 임명하지 말라는 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동시에 로마로 대표단을 파견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아르켈라오는 분봉왕으로 인정받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와 유사한 사건을 예수님께서 비유로 사용하십니다.
예수님께서 11절에 이 비유의 목적을 ‘하나님 나라가 당장 나타날 줄 오해한 제자’들의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서이기에 우리는 그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임하는 날, 그래서 구원과 심판이 결정되는 날은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다는 거죠. 다만 제자들이 생각하듯 메시아 예수가 예루살렘에 가면 그 즉시 구원과 심판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오히려 귀인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 백성들이 그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고 ‘열 므나’를 나누어받은 종들이 그에 대한 책임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도록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완성도 언제인지 알 수 없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심판주’로 왕의 강력한 권세를 가지고 돌아오셔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무시할 수 없는 기간이 지난 후에야 자신이 다시 오실 것이며, 그 기간 동안 정적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을지라도, 왕의 신하인 제자 너희들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수고할 것에 대해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 수고가 바로 받은 ‘열 므나’에 대한 종들의 태도에 비유되어 설명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에 대해 모두가 삭개오처럼 환대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임금이 되시는 것을 싫어하는 자들이 더 많습니다. 헤롯과 유대 지도자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존립을 위해서는 예수가 왕이 되어 나라를 독립시키는 것을 막아야 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맞습니다. 예수님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고, 내 나라를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묻고 계십니다. 우리도 혹 ‘내 나라’를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은 아닌지 말이지요. 믿음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 나의 욕망을 추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믿음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과 나의 욕망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내가 내리는 결정이 하나님에게 충성된 것인가, 아닌가에 따라 구분될 수 있다는 겁니다.
다시 열 므나 비유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한 므나 씩 받은 열 명의 종들 가운데 대부분은 주인이 명령한 대로 ‘장사’를 열심히 했습니다. 첫째 종은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둘째 종은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남겼습니다. 왕이 되어 돌아온 ‘귀인’은 명령한 일에 충성되어 자신의 역량에 따라 남긴 만큼의 결과를 보고, 각각 열 고을과 다섯 고을을 다스릴 권세를 부여합니다. 그런데 한 종은 자신이 받은 므나를 그대로 가지고 옵니다. 명령에 대해 충성하지 않은 겁니다. 하지만 핑계를 댑니다. 당신이 엄한 사람이라 무서워서 혹시 맡긴 한 므나 마저 손해를 보고 날릴까 염려하여 수건으로 싸두었다는 겁니다. 그러자 주인은 ‘내가 엄한 사람이고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사람이라 판단했다면 차라리 은행에 맡겨서 이자라도 나에게 가져 와야 되는 것 아니냐?’라고 말하면서,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남긴 이에게 주고, 악한 종은 가진 것마저 빼앗겼습니다.
귀인이 왕위를 받고 돌아와 므나를 맡긴 종들을 평가했을 때, 판단 기준은 이윤이 아니라 충성이었습니다. 므나를 남기지 못한 종은 그 원인을 주인의 성품 탓으로 돌리려 하다가 자신이 가진 것마저 빼앗깁니다. 깨닫게 됩니다. 올바른 섬김은 올바른 이해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말이지요. 불충은 ‘불신’에서 시작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모두 빼앗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를 잘 믿는다는 여기는 자들이 오해하여 예수의 왕권을 부인하고, 하나님 나라를 가장 열망하던 자들이 불충하여 그 나라를 훼방할 수 있습니다. 이 섬뜩한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열 므나’ 비유입니다. 소유권만이 아니라 구원의 ‘때’에 대한 주도권 또한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지금 나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 일에 충성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주님과 함께 다스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