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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눅 19:28-48
◎ 제목: 기대가 탄식으로
1. 본문개요 및 관찰
1) 28-40절: 예루살렘으로
A. 나귀 새끼를 준비(28-34절)
B. 나귀 타신 예수의 입성(35-38절)
C. 바리새인들의 제자(39-40절)
2) 41-44절: 예루살렘을 보고 우심
3) 45-48절: 성전에서
A. 장사치들을 내쫓으심(45-46절)
B. 가르치심(47-49절)
2. 적용
예수님의 탄생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아 사상적 배경에서 보았을 때, 예상 밖의 전개였습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아 사상 속에서 메시아는 정치적 메시아로서 왕궁에서 태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 멀리에서 메시아의 탄생을 맞이하러 별을 따라 왔던 동방박사들도 먼저 ‘예루살렘’으로 가서 ‘헤롯 대왕’을 만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큰 비극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동방박사들도, 빈 들의 목자들도 결국 아기 메시아를 알현한 곳은 베들레헴 어느 집의 마굿간의 말 구유였습니다.
예수님의 탄생만큼이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도 예상 밖의 전개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예수님을 향한 예루살렘 사람들의 시선은 이미 ‘왕’, 메시아입니다. 그런데 군왕이라면 멋들어진 말을 타고 입성하실 만합니다. 전쟁에 능한 만군의 왕의 모습으로 말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선택은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열강의 틈에서 생존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그러하기에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당시 공포의 대상이었던 ‘기병과 병거’를 동반한 로마를 압도하는 예루살렘 입성을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새끼 나귀를 탄 왕의 모습이라니 아마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예수님의 행보였을 겁니다.
오늘 본문 28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라고 기록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주저함 없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고 계심을 말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궁극에는 죽음을 기다리는 줄 알면서도 예루살렘을 향하며, 외면치 않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이제 예루살렘으로 곧 들어갈 수 있는 입구에 해당하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워지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맞은편 마을로 보내십니다. 그리고 30절에 제자들을 향해 아무도 타 보지 않은 새끼 나귀가 있을 것이니 풀어서 끌고 오라고 명령하십니다.
당신이 타실 나귀 새끼마저 손수 준비하시면서 적극적으로 순종의 길로 나아가십니다. 그는 영광 받을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지만, 동시에 수난받는 종이라는 정체도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사람들이 기대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을 능동적으로 선택하여 사는 삶이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도 그래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강요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드리기를 갈망하는 기도가 저와 여러분이 드려야 할 기도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35절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새끼 나귀를 태웁니다. 그리고 37절에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자, 제자의 온 무리가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기록합니다. 38절에는 그 찬양의 내용이 정확하게 기록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 예수님을 ‘평화의 왕’으로 영접합니다. 그러자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예수님을 ‘메시아, 왕’으로 대우하려는 자들을 꾸짖으라 요청합니다. 바리새인의 눈에 예수님은 아무리 인정해 봤자 ‘훌륭한 랍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메시아’로 부르니 마음에 들지 않은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40절에 만약 그들의 입을 막으면 돌들로 소리지를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신성모독으로 오해당하지 않도록 처신을 잘 하라는 식으로 예수님을 위하는 척 말했지만, 실상은 그들이 머리 속에 그려온 메시아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예수님에게 실망한 겁니다. 당시 사람들은 백마 탄 정복자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탄 겸손한 섬김의 메시아,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겸손과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십니다. 군림이 아닌 죽음을, 영광이 아닌 수치를, 선동이 아닌 섬김을 통해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그분의 나라는 가짜 평화를 선전하는 로마와 달리 사랑으로 이뤄지는 나라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로마를 몰아낼, 마치 로마와 닮은 ‘하나님 나라’를 꿈꾸고 있기에 새끼 나귀 위에 앉은 초라한 ‘메시아’는 인정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결코 ‘제국’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군림하는 나라가 아니라 섬기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완성되는 나라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도 그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매 순간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41-44절은 예루살렘이 예수님을 찬송하며 맞이할 때 예수님은 그 예루살렘을 보면서 우시는 장면이 묘사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빈들에서 목자들을 향하여 천사가 말한 평화의 왕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환호하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로마가 약속한 거짓 평화에 취해 있거나 군사적인 힘과 혁명으로 이룰 평화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은 결국에는 유대인들이 자신을 배반하거나 배척하여 자신을 것을 미리 아시고, 그 죄로 파멸할 예루살렘을 생각하고, 사랑하여 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린 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 분노하십니다. 예루살렘의 파멸을 불러온 주범은 누구입니까? 바로 타락한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 거룩함을 앗아가고, 그릇된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불러온 장본인이 바로 타락한 성전의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은 성전을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과 제물을 사적인 이익을 위해 도둑질하는 ‘강도의 소굴’로 변질시켰습니다. 이제 성전은 하나님과 살아 있는 소통과 교제의 장이 아니라, 힘 있는 자들의 탐욕과 무의미한 종교 행위만 무성한 우상숭배의 공간으로 변했습니다. 이러한 자신들의 치부가 들킨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꾀하지만, 백성들이 예수님을 따르니 민심이 무서워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오늘 본문이 마무리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그 순간 경배와 경멸이 교차하는 모습을 오늘 본문을 통해 발견합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의 뜻은 ‘평화의 도성’입니다. 하지만 그 곳에 ‘심판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위용을 자랑하던 성전은 위선으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표면’이 아니라 ‘이면, 내면’을 보시는 주님의 시선을 기억하고, 그 시선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 주님의 시선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결국 회복 없이 탄식과 감탄으로 바꿀 희망은 없습니다. 낮아지고 평화를 추구하는 예수의 제자도를 본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