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눅 20:19-40

◎ 본문: 눅 20:19-40
◎ 제목: 누구에게 충성하고 있는가

1. 본문개요 및 관찰
    1) 19-26절: 세금 논쟁
        A. 가이사에게 세금 내는 문제(19-22절)
        B.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23-26절)
    2) 27-40절: 부활 논쟁0
        A. 사두개인들의 부활 질문(27-33절)
        B. 예수의 답변: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34-40절)

2. 적용
    오늘 본문 19절에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즉시 체포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어제 우리가 함께 살펴보았던 눅 20:9-18에서 예수님께 말씀하신 ‘악한 포도원 농부 비유’가 자신들을 겨냥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백성들의 눈이 무서워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20절에 기회를 엿보다가 예수님을 로마 총독에게 넘길 계략을 세워 함정에 빠뜨리려고 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21절에 예수님에 대해 오직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친다고 말하며 예수님을 띄웁니다. 그 후에 22절에 세금을 로마에 바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묻습니다.

    이것은 로마의 정책에 맞서도록 유도하기 위한 질문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세금의 문제’에 있어서 반기를 드는 어떠한 발언이라도 한다면 체제 전복을 시도한 죄를 물어 로마의 처벌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예수님을 따르는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어쩔 수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간계를 다 알고 계셨고, 데나리온을 보이라고 하시면서 누구의 형상과 글귀가 새겨져 있는지를 되물으십니다. 그러자 ‘가이사의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그 대답을 듣자마자 예수님께서는 25절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대답하십니다. 여기에서 ‘바치다’라고 번역된 원어성경의 헬라어 원래 의미를 따른다면 ‘빌린 것이나 받은 것을 갚거나 되돌려주다.’입니다. 그러므로 25절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은 세금이 통치자의 보호와 혜택에 대한 보답으로 ‘갚아야 하는 의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결국 ‘바치는 대상’이 누구냐가 문제가 됩니다. 즉, ‘충성의 대상이 누구냐?’는 말입니다. 누구에게 우선권을 두는가를 결정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25절의 예수님의 명령은 십계명에서 제1계명의 의미를 상기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데나리온’을 자신에게 보이라고 하신 다음, 25절의 말씀을 하셨잖아요? 그 주화를 사용하는 사람은 황제에게 받은 것을 황제에게 갚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에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충성하고 갚아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데나리온 주화에 누구의 ‘형상’이 있느냐고 물으셨잖습니까? 가이사의 형상은 창세기 1:26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형상’과 대조를 이룹니다. 결국 가이사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에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이 절묘한 예수님의 대답 속에서 백성들과 예수님께 질문한 종교 지도자들의 사주를 받은 자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어지는 27~40절은 사두개인이 등장합니다. 사두개인들이 한 이야기를 예수님께 들려줍니다. 한 여자가 일곱 형제 중에 장남에게 시집갔는데 남편이 죽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계대혼’의 원리를 따라 차남에게 시집갑니다. 그런데 그도 죽고, 그 다음은 셋째와 혼인을 하고, 또 죽기를 반복하여 결국 일곱째 동생에게까지 시집을 가게 되어 결국 모든 형제가 자식이 없이 죽게 되고 그 여자도 죽었답니다. 그리고 사두개인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취하였는데, 만약 부활이 있다면 부활의 때에 그 여자는 과연 누구의 아내가 되는 겁니까?’라고 말입니다.

    사두개인들의 관점에서 부활은 현재 생의 연속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부활이 있고 내세가 존재한다면 ‘일곱 명의 남편과 한 명의 아내’라는 해괴한 일이 벌어지고 말 것이라는 겁니다. 현재 생의 연속이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원리를 설명하시면서 그들의 생각을 무너뜨리십니다. 첫 번째로 죽음 이후, 내세에 있는 부활에 합당한 자들과 이 세상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다르다는 것을 언급하십니다. 세상에서 시집, 장가 가는 일이 부활에 합당한 자들에게는 없습니다. 더 이상 죽을 일도 없고 천사와 동등 된 존재로 살게 됩니다. 두 번째로 부활 사상은 사두개인들이 언급한 ‘모세의 글’에도 나타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37절에 예수님이 인용하신 말씀은 출 3:6입니다. 여기에서 모세는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 임한 하나님을 향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현재 살아 있는 존재로 지칭합니다. 이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조상들이 죽었어도 살아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여기에 ‘부활 사상’이 녹아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시빗거리가 된 ‘세금 내는 문제’와 사두개인에 의해 공격당한 ‘부활의 문제’ 이 두 가지가 모두 이 시간 저와 여러분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누구에게, 그리고 무엇에 충성하는가?’의 문제와 연결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어떠한 권위도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은 대상은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세상의 어떠한 권위도 오직 하나님께만 복종하고 그분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종교지도자들은 이미 하나님보다는 ‘로마의 권력’에 충성합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이미 ‘황제’가 우상이 되어 있는 삶입니다. 사두개인 또한 마찬가집니다. 그들은 왜 부활을 믿지 않습니까? 현세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두개인 대부분이 제사장 직분을 가진 성직자들로서 성전을 중심으로 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들에게 ‘죽음 이후’는 관심 없습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을 내 손으로 주무르는 일에 익숙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관점에서 ‘내세도 부활도’ 존재해선 안 됩니다. 지금 내가 누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경고하는 동시에 지금 이 말씀을 듣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묻고 계십니다. 과연 우리는 누구를 향하여 충성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새벽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묻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누구에게 충성하고 있느냐?’고 말입니다. 우리는 ‘어떤 권위에 순종하고 있느냐?’고 주님께서 묻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준비하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이 이미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철저한 고백으로 ‘하나님께 갚아드리는 삶’으로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활에 합당한 자로 주님 앞에 설 것을 소망하며, 세상의 소망이 아니라 ‘천국 소망’으로 우리의 삶을 채워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주재권’을 인정하여 드리며 주님의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예수의 참 제자가 되어 오직 그분만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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