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눅 20:41-21:4

◎ 본문: 눅 20:41-21:4
◎ 제목: 의와 이익 사이에서 우리가 서야 할 자리

1. 본문개요 및 관찰
    1) 41-44절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
        A.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41절)
        B. 다윗의 주, 그리스도(42-44절)
    2) 45-47절 서기관들을 삼가라
        A. 서기관들이 좋아하는 것(45-46절)
        B. 서기관들의 표리부동한 모습(47절)
    3) 21:1-4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2. 적용
    우리가 어제까지 살펴보았던 눅 20:40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종교 지도자들에게 계속 질문을 받으시고, 거기에 대한 대답을 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41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질문을 하십니다. “어떻게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할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대답’을 듣기 위한 질문이라기보다는 ‘수사학적 질문’입니다. 즉,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질문을 던지신 겁니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없는 근거로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다름 아닌 시편 110편입니다. 예수님께선 다윗이 지칭한 ‘내 주’를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십니다. 42절에 다윗이 친히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라고 할 때에, 앞의 ‘주께서’에서의 주는 ‘여호와’이고, 뒤의 ‘내 주께 이르시되’라고 할 때에 ‘내 주’는 메시아 즉, 그리스도를 의미한다는 거죠. 여호와께서 그리스도에게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기까지 ‘내 우편’에 앉으라고 하셨다는 고백이 바로 ‘다윗의 시’, 110편입니다.

    오늘 20:41-44절에 예수님께서 종교지도자들에게 던지는 이 질문은 눅 20:2절에서 그들이 예수님을 향해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성육신 하셨지만, 다윗이 섬겨야 하는 ‘주’, 곧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그 권위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는 권위’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권위로 성전을 청소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질문과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신 것에 대해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해 누가는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이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저와 여러분에게 어떤 반응을 요구합니다. 어떻게 예수가 동시에 ‘주, 그리스도’와 다윗의 자손인 ‘인간’이 될 수 있습니까?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신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 역설적인 질문에 대해 대답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말했던 것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이 바로 우리의 대답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 예수님을 향해 마땅히 보여 드려야 할 태도임을 깨닫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어지는 20:45-47에서는 통해 종교지도자들의 탐욕과 위선이 고발됩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그들의 반응을 대신하고 있는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어떤 면을 지적하고 계십니까? 먼저 서기관들은 그들의 ‘정복’인 길고 늘어진 형태의 옷을 입기 원했습니다. 그 옷을 통해 자신의 명예와 고귀함을 드러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좋아하는 세 가지 모습’을 제시하십니다. 첫 번째로 시장에서 인사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여기에서 ‘인사’는 아부하는 자들의 과장된 칭송이 담긴 인사를 뜻합니다. 두 번째로 회당에서 으뜸이 되는 자리에 앉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 자리는 높은 위치에 있는 의자로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앞 쪽에 배열되어 있는 자리입니다. 세 번째로 그들은 잔치의 첫 번째 자리를 좋아합니다. 당시 문화에서 식사 초대자는 서기관을 위해 가장 중요하고 영예로운 자리를 제공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서기관들의 일상에서의 행위들은 철저히 계산된 방식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선호하고 영광을 얻기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매우 ‘탐욕적’입니다. 서기관들은 당대의 ‘율법 전문가’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의 정신인 ‘이웃사랑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실천해야 함에도 자신의 권위와 권력을 이용하여 높임을 받고 과부의 재산을 강탈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잘 안다고 하고,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이들이 정작 자신들의 눈앞에 나타난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신들도 모르게 스스로 ‘그리스도의 권위’에 방불하는 위치에 자기 자신을 ‘우상’으로 세워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어야겠습니다. 말씀을 잘 알고, 신학적인 지식을 잘 알고 있는 것이 우리를 구원해 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아는 지식과 말씀의 지혜가 우리의 마음과 손과 발로 이어져야 합니다. 스스로를 높이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과 온유, 자기 절제’의 삶을 추구함이 바로 성도가 감당해야 할 삶의 모습이라는 것을 이 새벽에 다시 한번 다짐하며 나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눅 20장 1절부터 시작된 ‘권위에 대한 논쟁’은 21장 4절에서 마무리가 됩니다. 그런데 이 ‘권위에 대한 논쟁’을 이어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동기가 되는 물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동전’입니다. 우리가 어제 살펴본 20:19-26절에서도 ‘데나리온 동전’을 통해 권위의 문제에 대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잖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권위’에 대한 가르침의 마무리도 동전으로 갈무리하시는 모습을 봅니다. 바로 ‘과부의 두 렙돈’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부자들의 헌금’과 ‘과부의 두 렙돈’을 대조하십니다. 그리고 과부의 헌금이 더 많다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부자’들은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일 수도 있지만, 47절에 서기관들이 과부의 가산을 삼킨다는 표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서기관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부자들의 헌금 속에는 스스로의 ‘탐욕과 권위’를 세우려는 욕구가 가득하지만, 과부의 두 렙돈에는 진심으로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고 헌신하려는 진심이 녹아 있습니다.

    예수님은 ‘권위의 논쟁’을 통해 결국 ‘권위를 다투는 문제’는 ‘주재권의 문제’와 연결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진 무형, 유형의 것들이 다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사람이 바로 예수의 참된 제자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전부’를 원하십니다.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며 선물이라고 여기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이 높임 받아야 하고,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에 급급한 사람들은 절대로 자기 손에 들린 것에 대해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결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권위에 대해 논쟁’할 뿐입니다.

    이 새벽에 나는 내가 가진 것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는 사람인지를 다시 한번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로 돌려 드릴 것을 결단하는 삶입니까? 아니면 의와 이익 사이에 내 탐욕과 나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욕구가 끼어들어 스스로를 우상의 자리에 세우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나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주께 드리기로 결단하여 매 순간 ‘하나님 나라와 의’의 자리에 자신을 세우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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