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눅 21:20-28

◎ 본문: 눅 21:20-28
◎ 제목: 끝에서 보이는 것

1. 본문개요 및 관찰
    1) 20-24절 예루살렘에 임할 환난
        A. 포위된 예루살렘(20-22절)
        B. 징벌의 날(23-24절)
    2) 25-28절 인자의 임함
        A. 파루시아의 징조들(25-26절)
        B. 구름 타고 오실 인자(27-28절)

2. 적용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에 임할 환난과 더불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재림의 때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 말씀하실 때, 역사적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여 마지막 인류의 마지막 종말, 이것을 헬라어 원어 성경으로는 ‘파루시아’라고 부르는데, 여기까지 연관 지어서 말씀하신다는 거죠. 그 이유는 멸망의 증거들이 매우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20절에 예루살렘에 군대가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 알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당시 무리의 관점에서 이 예루살렘을 에워쌀 군대는 로마 군대로 연상을 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 군대에 의해 에워싸이는 예루살렘의 멸망은 이미 예수님 오시기 전에 한차례 치러졌습니다. BC 63년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시점에서 100여 년 전, 폼페이의 로마 군단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승천하신 후, 주후 70년 황제로 등극한 베스파시아누스가 아들 티투스 장군을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보내어 결국 예루살렘을 멸망시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 성 내에서 티투스에 의해 죽은 유대인의 수가 110만 명이라 기록합니다. 요세푸스가 다수 숫자를 약간 과장하여 기록하는 측면이 있다고 하지만, 상당한 사람이 죽은 것은 명백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곧 ‘예루살렘 성전의 종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22절에 ‘이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기록된 모든 것’은 구약 선지자들에 의해 기록된 ‘이스라엘 멸망’에 대한 기록을 말합니다. 성전 파괴와 예루살렘 멸망은 그곳에 임재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내리시는 심판의 형벌입니다. 이스라엘은 숱하게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외면했으며, 결국 하나님의 아들 예수 자신까지 거절한 채 끝까지 회개를 거부한 결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24절에 하나님의 도성으로서의 ‘예루살렘의 영광’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짓밟힐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께서 선언하시는 멸망의 메시지를 들으면서 깨달아야 합니다. 예고 없는, 이유 없는 심판은 없다는 것을 말이지요.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멸망의 날이 이르러서야 오랜 거역의 끝이 멸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실 때 예루살렘의 죄악은 이미 깊었고, 하나님의 오랜 자비를 거절하고 외면하면서도 무탈할 것이라는 신념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거짓 위안만 좇았고 거짓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교회는 어떠할까요? 한국 교회도 결국 대한민국의 역사와 무관한 존재일 수 없습니다. 시대가 멸망으로 치닫는 모습을 본다면 교회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외쳤던 것처럼, 멸망의 길로 달려가는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셨던 예수님처럼 말씀과 공동체, 그리고 상황을 통해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잘 분별하고 경고 또한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회개도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 가운데 알려야 합니다. 분명 하나님이 말씀하신 마지막 때가 있다고요. 돌이키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매 순간 주어진 것이 아님을 기억하고 돌이키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먼저 바로 서고, 세상을 향하여 선포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25절부터는 ‘인자의 임함’, 즉 종말의 마지막 날에 ‘재림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앞선 예루살렘의 멸망을 다루는 부분의 마지막 절인 24절과 그리스도의 임함에 대한 내용이 시작되는 25절 사이에 단순히 접속사, 카이(και), 한글로 치면 ‘그리고’ 정도의 단순한 접속사 하나로 연결됩니다. 이는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이야기는 종결하고, 마지막 때에 관한 내용으로 넘어가는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예루살렘 멸망을 확대해서 설명하고 있는지 모호함을 남깁니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멸망이 갖는 ‘상징적 의미’가 마지막 때의 ‘종말론적 의미’로 확대된다는 관점에서 25절 이하의 ‘마지막 때’에 대한 설명을 이어가신다고 보는 것이 가장 좋은 해석인 것 같습니다. 25-26절은 ‘하늘의 징조’가 ‘땅의 징조’를 감싼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월성신의 징조가 땅에 커다란 혼란을 초래하는 장면은 ‘구약의 선지서’에서도 많이 나타납니다. 이와 같은 ‘하늘의 징조’가 마치 괄호처럼 25절 전반부와 26절 후반부에 나오고, 그 사이에 ‘쓰나미로 인한 혼란, 세상에 임할 자연재해’ 등, 땅의 징조가 가운데를 채웁니다.

    이러한 혼란 가운데에서 결국 인자를 배척하고 죽인 자들에게 그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불의하고 기고만장했던 그들의 교만은 당혹과 두려움을 바뀔 것이고, 그날 그들의 부와 권력이 아무 역할도 못 할 것입니다. 어떠한 부와 권력도 그들을 심판에서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제는 21절에 ‘예루살렘의 멸망’의 때에 도성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지침처럼, 불의와 멸망의 도성으로 들어가지 말고 도리어 그곳에서 벗어나 도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성령님의 인도 안에서 담대한 자만 두려움 없이 그 마지막 날에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종말 현상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 전체가 시간의 끝을 향해 가고 있음을 묘사합니다. 이처럼 기이한 현상들의 절정은 ‘파루시아’라는 용어로 불리는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행 1:9-11에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는 자신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보는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그것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실제적인 증거이며 확실한 약속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환난 중에 인내하며 믿음을 지킨 성도들에게 성전 멸망은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를 죽인 성전의 멸망은 예수께서 참 메시아, 인자이셨음을 입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런 일이 시작되면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일어나 머리를 들어 구원을 확신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와 부활, 예루살렘 심판을 통해 세상의 진정한 구주이고 왕이며 심판자이심을 온 천하에 드러내셨습니다. 마지막 때에 더욱 그분의 주권과 통치를 신뢰하고, 세상의 위협에 위축되지도,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지도 말아야 합니다. 끝까지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는 주님이 우리의 삶을 포기하지 않으시기에 우리도 마지막 날에 오셔서 우리로 부활케 하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실 그 주님을 사모하며 언제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마라나타를 부르짖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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