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암 6:1-14
◎ 제목: 파국에 이른 영광

1. 본문개요 및 관찰
    1) 1-7절: 두 번째 ‘화’ 신탁
      a. 안일하고 자신만만한 이스라엘의 실태 고발(1-6절)
      b. 심판 선언: 포로가 될 것이다(7절)
    2) 8-11절: 구체적인 심판의 양상(1)
      a. 야곱의 교만(8절)
      b. 심판선언: 파괴와 죽음(9-11절)
    3) 12-14절: 구체적 심판의 양상(2)
      a. 야곱의 불의와 자만(12-13절)
      b. 심판 선언: 한 나라의 등장(14절)

2. 적용
    윤동주 시인은 자신의 시 참회록에서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에 비친 것 같은 자기 모습을 부끄러워합니다. 그러면서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 손바닥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라고 다짐을 하지요. 이 시를 썼을 때, 일제강점기는 말기에 접어 들었습니다. 일본어 사용, 창씨개명, 조선인 강제 징용 및 위안부 동원 등 민족 정체성 말살을 위한 극심한 억압이 심화되던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참회록’이라는 시를 통해 민족적 슬픔과 개인적인 고뇌를 표현한 겁니다. 그 노력이 다름 아닌 ‘녹슨 구리거울을 닦는 것’입니다.

    6장에는 ‘두 번째 화의 신탁’이 주어집니다. 당시 경제적 부가 가져다 주는 안일한 삶은 이스라엘을 교만하고 자신만만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치 열방 중 으뜸인 양 행동합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잠시의 안락함은 영원히 지속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걸고 이스라엘의 파멸을 맹세하십니다. 백성들의 죽음, 산산이 부서지는 집들, 그리고 그들의 기대는 좌절로 바뀝니다.

    1절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먼저 ‘교만한 자’는 ‘안일한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 다음으로 ‘마음이 든든한 자’는 ‘자신을 믿는 자신만만한 사람들’이라는 뜻이고, 세 번째로 ‘백성들의 머리인 지도자들’은 ‘열방의 으뜸인 구별된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끝으로 ‘이스라엘 집이 그들을 따른다.’는 것은 ‘이스라엘 안에서 영향력 있는 지도자’라는 의미이지요. 그런데 1절에 이 네 가지로 설명된 이들에 대해 ‘시온’이 언급됩니다. 이것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지도자들이 본질적으로 같음을 시사합니다. 또한 사마리아를 시온과 비교하면서 자신들의 우월감을 드러내었던 북이스라엘을 조롱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지도자들은 스스로 열방의 유력자를 자처하며 교만한 모습을 보입니다. 사회 경제적 풍요가 마치 자신들이 노력한 결과인 양 과시욕과 우월의식, 자만에 빠져 있는 겁니다. 어리석게도 백성들은 이런 지도자들을 의지하고 따릅니다. 우물 안에 머물며 안일과 착각에 빠져 있지 않은지 점검하라는 충고입니다. 빨리 그 환상에서 벗어 나는 것이 화를 면하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치 권력이 타락하는 이유는 딱 한가지입니다. 자신들이 그 위치에 오른 것이 오롯이 자신들이 가진 재능과 노력의 결과로 치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특히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에선 결코 가져서는 안 되는 사고방식 아니겠습니까? 지금 이 사회가 혼란과 고통에 내 몰리는 이유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루 속히 내려 놓아야 합니다. 자신이 잘 나서 되었다는 생각, 그래서 자신들이 거기에 서 있다는 생각을 내려 놓지 못하면, 결국 하나님께서 끌어내리실 수밖에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4-6절은 지도자들의 모습을 더 상세하게 기술합니다. 지도자들은 허영에 빠져 상아 침대로 대변되는 사치를 일삼고, 살진 송아지 요리의 풍요를 누렸습니다. 악기와 노래를 즐깁니다. 하지만 다윗이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높여드린 그 신앙은 따르지 않습니다. 포도주를 즐기고 기름 마사지를 받습니다. 그러나 나라의 미래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웃의 가난과 고통을 외면한 채 오로지 개인의 영달과 쾌락에 심취해 살아가는 이들에게 ‘흉한 날’을 예고하나, 안락하고 배부른 이들은 이를 비웃습니다. 특히 6절에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한다.’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는 요셉이 야곱 가족보다 먼저 노예로서 애굽에 와서 당한 고난을 통해 ‘이스라엘의 구원’의 기틀을 마련한 것을 빗대어서 그 ‘요셉’의 길을 버리고 ‘바로의 나라, 애굽’의 모습을 답습하는 북이스라엘의 모습은 다름 아닌 ‘구원’에 대한 배신이자 은혜에 대한 모독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꿈쩍도 하지 않는 북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은 두 차례에 걸쳐 심판 선언을 하십니다. 먼저 8-11절에서는 ‘파괴와 죽음’이 가득한 이스라엘의 미래를 예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읍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원수에게 넘기겠다고 하십니다. 극심한 심판으로 인하여 살아남은 자가 없고, 그로 인하여 시체를 불사르려고 온 자가 시체가 더 없는지 묻게 될 것이고, 저마다 혹여 주의 이름을 언급하면 더 큰 재앙을 내릴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이게 될 것이라 경고하십니다.

    12-14절에서는 ‘한 나라’를 징계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것에 대해 선언하십니다. 12절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달콤해야 할 정의를 쓰디 쓴 쓸개로 바꾸었고, 공의의 열매를 쓴 쑥으로 바꾸어버린 이스라엘의 행위를 성토합니다. 그러면서 14절에 하나님께서 한 나라를 일으키시고 이스라엘을 쳐서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시내’까지 너희를 학대하겠다 하십니다.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시내’까지는 여로보암 2세의 치세 동안에 다시 회복했던 이스라엘의 영토입니다. 그 땅을 하나님은 이방의 한 나라, ‘앗수르’에 의해 모조리 삼켜지게 되는 결과를 맞이할 것이라고 심판을 선언하시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준엄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앞에 이스라엘이 감당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철저한 ‘자기 부정’입니다. 앞선 윤동주의 ‘참회록’처럼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청동 거울을 닦듯 자신의 내면에 자라 있는 ‘사적 욕망’을 잘라내고, 철저히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된다는 ‘하나님 존전의식’을 회복하는 것만이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하지만 북 이스라엘은 끝내 그 길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지도자들은 악행을 반복하였고, 그들의 악행을 지적하는 선지자들을 위협하였습니다. 끝내 사회를 회복불능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좌시하지 않으셨고, 나라는 망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부와 명성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져야 할 책임의 무게가 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것을 놓치는 순간 결국 ‘욕망의 열차’는 브레이크를 잃어버리고 절벽을 향해 곤두박질 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의 경고와 지금 이 시대의 상황을 바라보며, 참으로 참담하고 아픈 가슴을 쓸어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지금은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다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풀어주셔야 모든 것이 풀립니다. 이 시대의 모든 교만함을 마치 내 것 인 냥 주님께 토하며 회개의 기도를 드리는 이 시간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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