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욥 33:1-33


◎ 본문: 욥기 33:1-33
◎ 제목: 옳지만 옳지 않은 말

1. 본문 개요
    욥 33:1-33           욥을 향한 엘리후의 발언

2. 본문 관찰
    a. 1-7절: 욥을 향한 엘리후의 준비 발언
    b. 8-13절: 엘리후가 생각하는 욥의 잘못된 지혜
    c. 14-22절: 하나님의 계시 방식에 대한 엘리후의 의견
    d. 23-30절: 지혜를 통한 회복을 말하는 엘리후
    e. 31-33절: 욥에게 지혜를 가르쳐주겠다는 엘리후의 발언

3. 적용
    32장부터 ‘엘리후’가 등장합니다. 그는 ‘양비론자’입니다. 논쟁하며 맞서는 두 집단의 양쪽 의견이 모두 틀렸다고 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사람을 ‘양비론자’라고 부르지요. 엘리후는 세 친구의 규범적 지혜나 욥의 반성적 지혜, 그 어디에도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다른 지혜를 제시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막상 엘리후의 주장도 결국 ‘세 친구’들과 욥의 말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32장에서는 엘리후가 세 친구들을 향해 말을 했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33장에서는 엘리후가 욥을 돌아보면서 말을 건넵니다. 1절에 엘리후가 ‘자기 말에 귀를 기울여 달라’는 요청으로 말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어 자신의 지혜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말하기 전에 그 출처를 밝힙니다. 3-4절에 따르면 자신의 지혜는 하나님께서 직접 알려주신 것이고, 자신은 그분의 영이 가르쳐 준 것을 덧붙이거나 빼지 않고 전달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엘리후는 하나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지혜를 전달하기 때문에 자신감에 넘쳐있습니다. 5절에 자신이 발언하는 동안 ‘할 수 있거든 일어서서 내게 대답하고 내 앞에 진술하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자신의 발언에 대해 반박할 수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표출하는 듯합니다.

    6-7절을 보면 엘리후가 욥에게 인간의 보잘 것 없음을 알려줌으로써 ‘건방진 욥’에게 겸손을 가르쳐 주려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6절을 히브리어 원어 그대로 직역을 해보면 “보라, 나도 하나님께 대하여는 당신이 말한 대로 역시 진흙으로 지어졌다.”가 됩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욥 당신이 말 한대로 인간은 한낱 흙 알갱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나도 잘 알고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즉, 욥의 말에 동의하고 있는 모양새인 겁니다. 그렇다면 6-7절의 말씀을 통해 엘리후가 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은 욥과 동일한 인간에 불과해서 자신의 힘으로는 욥을 이길 수 없지만, 자신의 지혜만큼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말에는 신적 권위가 있음을 부각시키는 겁니다.

    이제 8-13절을 통해서 엘리후는 욥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으려고 합니다. 엘리후는 9-11절을 통해 욥의 주장을 요약합니다. 엘리후가 볼 때에 욥의 주장은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이 깨끗하고, 아무 죄도 짓지 않았기에 무죄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게서 잘못을 찾으려 하시고 나를 하나님의 적으로 여기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발에 족쇄를 채워서 아무데도 못 가게 가둬놓으셨다.”는 겁니다. 욥의 주장을 이렇게 요약하는 것은 크게 문제가 없습니다. 욥의 무죄 주장과 욥의고난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벌어지는 것이라고 ‘욥’이 주장한 부분을 잘 요악하였습니다.

    그리고 엘리후는 12절부터 이 욥의 주장의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12절에 엘리후는 ‘나는 당신이 이 지점에서 틀렸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인간보다 크시다는 점입니다.’라고 욥의 주장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13절에 ‘하나님은 인간에 비할 바 없으신 엄청난 분이기시 때문에 인간의 말에 일일이 대꾸하실 필요가 없다. 그분께서 대답을 안 하시는데 어디 감히 인간 따위가 하나님께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하느냐.“고 엘리후가 주장을 합니다. 그러니까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을 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계속해서 욥기를 살펴보면서 알고 있는 것은 욥의 ‘반성적 지혜’의 핵심이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를 더욱 벌리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인간의 보잘것없음을 강조하는 부분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옆을 지나가도 인간은 알 수 없고, 그 분이 말씀을 하셔도 인간은 모를 수 있다는 것이 욥의 주장이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지금 엘리후는 그러한 ‘반성적 지혜’의 주장을 가지고 욥을 비판하고 있는 겁니다. 엘리후가 말하는 그 지혜로 자신의 논리를 펴온 욥을 비판하고 있으니 당황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런데 엘리후의 주장이 당황스러운 것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13절까지 ‘반성적 지혜’의 주제를 가지고 욥을 비판했던 엘리후가 이어지는 14-30절에서는 ‘규범적 지혜의 주제’를 이어붙이고 있다는 겁니다. 15절과 19-22절을 통해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꿈이나 환상, 혹은 질병 등을 통해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고 가르침을 직접 주신다는 겁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귀를 열고 가슴팍에 교훈의 말씀을 새겨 넣으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사람으로 하여금 잘못된 행실을 버리고 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8절에 인간이 잘못된 길을 따라가다가 사망에 이르는 우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덧붙입니다. 왜냐하면 지혜의 길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습니까? 엘리후가 잘못된 이야기를 하고 있나요? 아닙니다. 다 바른 말을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금 엘리후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지혜다. 이제 내가 그것으로 욥 너에게 말한다. 아마 너는 도저히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쏟아놓는 말들이 뭔가 특별한가라는 의문이 든다는 겁니다. 새롭냐는 거죠.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세 친구들이 줄곧 반복해온 주제입니다. 전형적인 규범적 지혜의 가르침이라는 말입니다.

    엘리후는 특별히 ‘질병’이 하나님의 경고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19-22절에 나타난 바, 잠자리에서 극심한 통증을 경험하고, 결국 좋아하는 음식마저 먹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러 근육은 하나도 남지 않고 뼈만 남게 되고, 그것은 곧 죽음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질병을 통한 하나님의 경고를 무겁게 받아야 한다고 엘리후가 주장한다는 거죠. 물론 질병이 일면 인간의 무지, 죄로 인한 것이고 사람을 가르치려는 하나님의 경고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결코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라는 겁니다.

    엘리후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되는 계기’가 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깨달음’입니다. 23-26절에 따르면 한 천사가 인간에게 와서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알려줄 때, 그 잘못을 깨달은 인간에게 하나님은 무척 기뻐하시고, 그 회개한 죄인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하시며, 그가 계속해서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29-30절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잘못된 길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이런 일을 마다하지 않으신다고 엘리후는 주장을 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엘리후가 옳은 소리를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천사가 중재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호소하는 자기 백성의 기도를 직접 들어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자신의 주장에 의하면 하나님은 점점 작아지실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이 모든 말이 욥에게는 해당 되지 않는 말입니다. 아무리 옳은 말이어도 말이지요. 자기 확신에 가득하여 정답만 제시하려는 사람을 만나면 참 답답합니다. 그 때엔 ‘침묵’이 상책입니다. 진정한 충고는 오히려 옳은 말이라도 모든 사람에게 다 옳지는 않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하는 충고가 아니겠습니까? 이 시간 옳은 말을 많이 하는 삶이 아니라 상황에 맞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에게 맞는’ 말을 떠벌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맞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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