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욥기 34:1-30
◎ 제목: 빛나간 변론
1. 본문 개요
욥 34:1-30 반복되는 규범적 지혜와 반성적 지혜
2. 본문 관찰
a. 1-4절: 지혜의 대결로의 초청
b. 5-9절: 욥의 잘못된 생각
c. 10-12절: 규범적 지혜(1)- 인과응보의 원리와 하나님의 선하심
d. 13-20절: 반성적 지혜- 하나님의 절대주권
e. 21-30절: 규범적 지혜(2)- 악을 징벌하시는 하나님
3. 적용
1절에 ‘엘리후가 말하여 이르되’라고 할 때 ‘말하다.’는 대답하다는 의미입니다. 대답은 누군가의 질문에 대해 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엘리후에게 어느 누구도 응답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혼자 대답합니다. 어제 살펴본 33장은 정확하게 ‘욥’이라는 한 사람을 겨냥하여 한 말이라면, 오늘 살펴보는 34장은 다수의 듣는 이를 상정하고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그런데 2절에 나타난 대로 ‘지혜있는 자들아 내 말을 들으라’라고 할 때에는 ‘엘리후’의 자신감이 묻어나는 것을 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엘리후 자신과 욥 사이에서 누구의 말이 옳은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의 표현인 셈이지요.
5-6절은 엘리후가 욥의 발언을 자신의 해석을 가미하여 인용하고 있습니다. 먼저 5절에 ‘하나님이 내 의를 부인하셨고’는 앞선 27:2절에 욥이 한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겁니다. 우리 한글성경에는 오늘 5절과 27:2절이 다르게 번역되었지만 원문상으로는 같습니다. 그런데 6절에 ‘내가 정당함에도 거짓말쟁이라 하였고’는 정확한 인용이 아닙니다. 욥은 앞선 24:25에서 ‘누가 나를 거짓말쟁이라고 할 것인가?’라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표현이 욥 자신을 가리켜 거짓말쟁이가 아니라는 의미로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6절 하반절에 ‘나는 허물이 없으니 화살로 상처를 입었노라’라는 부분은 앞선 6:4절에 욥이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라고 말한 것을 느슨하게 인용한 듯 합니다.
엘리후가 욥의 이 말들을 인용한 이유는 욥이 ‘인과응보의 원리’를 부정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인과응보의 원리는 하나님의 선하심, 즉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핵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원리를 부정하는 것은 곧 하나님이 의롭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규범적 지혜를 고수하는 입장에서는 신성모독과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엘리후는 7절에 비방하는 이런 말을 ‘물마시듯’하는 욥을 악인이라 부르지 않으면 누가 악인이겠느냐고 주장합니다. 또한 8절에 욥이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한패가 되어 악인과 함께 다니면서” 이런 말을 지껄이고 다닌다고 그를 비난합니다.
엘리후의 논리를 따르자면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기에 이 사실을 부정하는 욥은 악인 중의 괴수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의롭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10절에 엘리후는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결코 불의를 행하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그러면서 11절에 엘리후는 ’욥의 세 친구‘들과 똑같은 논리인 ’사람의 행위를 다라 갚으사 각각 그 행위대로 받게 하신다.‘는 ’뿌린 대로 거둔다는 원리‘를 거듭 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10-12절까지 인과 응보의 원리에 따른 규범적 지혜에 대해 이야기를 한 후에 이어지는 13-20절에서는 다시 ‘반성적 지혜’를 이야기합니다. 그는 먼저 13정에 세상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이 땅의 통치권을 부여한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14-15절에서는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의 호흡을 거두어버리기로 마음을 먹으면, 모든 생명체는 한꺼번에 숨을 거둘 것이고 인간 또한 모두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들은 모두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흙으로 돌려보낼 수 있다.’고 할 때에, 그 속에는 의인과 악인의 구별이 없습니다. 즉, 행위대로 상을 받고 벌을 받는 시스템이 아닌 겁니다. 그러므로 13-16절은 방금 전에 자신이 말한 인과응보의 원리와 상충되는 겁니다. 그런데도 엘리후는 이 두 원리를 동시에 말합니다.
다시 17절로 돌아오면 ‘의와 죄’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규범적 지혜의 어휘이지요. 모든 생명체를 의인과 악인으로 구별하지 않으시고 모두 죽일 수 있는 분이라고 조금 전 16절에서 말을 해 두고서는 다시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선하신 분이라고, 어떻게 욥은 이런 분을 악하다고 할 수 있느냐고 17절에 언급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19절에 “하나님은 권력을 가진 자라고 편애하시지 않는다. 가난한 자들보다 부자들을 더 잘 대접하는 분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 그분의 손으로 만든 피조물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규범적 지혜의 틀 안에서 ’왕, 귀족, 부자‘는 의인이자 지혜자를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들을 편애하지 않으시고, 모두 동일하게 대접하신다고 하니 이 가르침은 ’반성적 지혜‘의 가르침입니다. 큰 틀에서 ’반성적 지혜‘를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엘리후는 ’규범적 지혜‘와 혼동하여 왔다갔다 하고 있다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마무리인 21-30절은 ‘절대주권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진술과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진술을 서로 연결시키고 있는 것을 봅니다. 다시 ‘규범적 지혜’로 되돌아오는 겁니다. 엘리후는 21절에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가는 모든 길과 모든 걸음을 다 아시고, 22절에 악을 행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시선으로부터 숨을만한 어둠이나 그늘은 없다고 말합니다. 21절은 분명히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진술로서, 앞선 욥 31:4에 욥이 말한 반성적 지혜를 인용한 표현입니다. 22절은 11:10-11절에 소발이 말했던 내용을 변형한 겁니다. 이처럼 서로 충돌하는 반성적 지혜와 규범적 지혜를 서로 붙여놓고 있습니다.
23-27절에서 엘리후는 하나님은 ‘척 보면 아시는 분’이시기에 악한 자들을 내쫓고,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을 앉히며, 그분께서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그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고 깨달아 알지 못하는 아둔한 자들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철저히 ‘규범적 지혜’의 바탕으로 말을 이어갑니다. 그런데 29절에서는 다시 ‘하나님의 침묵’과 모든 민족과 인류에게 동일하심과 같은 표현으로 다시 ‘반성적 지혜’에 관련된 하나님에 대한 진술을 합니다. 이렇게 29절 뒤에 30절을 ‘이는 경건치 못한 자가 권세를 잡아 백성을 옳아매지 못하게 히려 하심이니라’라고 다시 규범적 지혜가 담긴 문장으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계속 왔다 갔다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엘리후는 욥의 행동을 과장할 뿐만 아니라 욥의 행동을 악의적으로 왜곡합니다. 시종일관 욥에게는 가혹한 검사처럼, 하나님에 대해서는 한 번도 져 본적이 없는 변호사처럼 변론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엘리후는 분명 ‘욥과 하나님’ 사이를 중재하기로 자처한 사람인데, 오히려 하나님과 욥 사이를 더 멀어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계속해서 ‘규범적 지혜와 반성적 지혜’ 사이에 시소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양쪽다 틀렸다고 말하면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그는 지금 양쪽 논리에서 좋은 말, 그럴 듯한 말, 괜찮아 보이는 말들을 골라서 죽 이어붙이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됩니까? 분명 구구절절 옳은 말인데 숨이 막힙니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는데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부조리한 현실이나 부당해 보이는 고난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갈등도 회의도’ 용납하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 모습은 고통 속에 터져 나오는 비명조차도 논리적이고 신학적이어야 한다는 주장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섬뜩한 종교인’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자비 없는 정의가 없고, 갈등 없는 신앙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새벽에 ‘하나님을 변호하려는 교만’함을 내려놓고, 고통과 고난에 허우적대는 이들을 말없이 일으켜 세워주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조적이고 율법적인 ‘종교인’이 아닌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참 신앙인’으로 사는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