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욥기 34:31-35:16

◎ 본문: 욥 34:31-35-16
◎ 제목: 과도한 변론

1. 본문 개요
    a. 욥 34:31-35:16           덮어놓고 욥을 비난하는 엘리후


2. 본문 관찰
    a. 31-37절: 욥의 무지(악)에 대한 엘리후의 정죄
    b. 35:1-10절: 반성적 지혜로 욥에 대해 비판하고 조언하는 엘리후
    c. 35:11-13절: 규범적 지혜의 주제
    d. 35:14-16절: 욥의 말에 대해 다시 비난하는 엘리후


3. 적용
    엘리후는 자신의 말을 이어가는데 있어 ‘타인의 권위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지혜자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혹은 ‘지혜자라면 내 말에 동의할 것이다.’라는 방식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타인의 입을 통해 말하게 하려 하는 것이 바로 엘리후의 화법입니다. 오늘 본문 34:5절도 그런 방식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지혜자가 만약에 욥의 말을 들으면 그가 아는 것도 없으면서 무식한 말을 늘여놓고 있다고 말할 것이라는 거죠. 이런 화법을 구사하는 것은 자신의 지혜가 누구나 동의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자신감의 표출일 수도 있고, 권위가 부족한 나이 어린 엘리후가 설득력을 확보하기 위한 일종의 수사법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아무도 반응하지 않지만 엘리후는 꿋꿋이 말을 이어갑니다. 말을 이끌어가는 구조는 이전과 동일합니다. 우선 욥의 말을 인용하여 반박하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따지고 검증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엘리후의 지혜에는 욥의 세 친구들의 규범적 지혜와 욥의 반성적 지혜가 뒤섞여 있습니다. 이 ‘규범적 지혜’와 ‘반성적 지혜’를 세밀하게 구분해내는 것이 ‘엘리후의 발언’을 이해하는 관건입니다.

    34:31-33절은 해석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먼저 31-32절은 엘리후가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께 회개하는 내용’을 가정하여 하는 말입니다. 만약 참으로 ‘경건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고난에 대하여 하나님을 향해 ‘내가 죄를 지었사오니 다시는 범죄 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쳐주시고 내가 악을 행하였으나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반응할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욥이 과연 그렇게 했느냐는 겁니다. 욥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후는 욥이 악인이고 죄를 회개하지 않고 참으로 무지한 자라고 평가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33절에 하나님께 온당하게 나아가는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을 거부하기 때문에 하나님도 욥 당신과 화목하지 않을 것을 경고합니다.

    그러면서 엘리후는 34-35절에 자신의 주장을 공고히 하려고 ‘슬기로운 자와 지혜 있는 사람’을 가정하여서 ‘그 사람들이 이 상황을 본다면 욥이 무식하게 말하고 그의 말이 지혜롭지 못하다고 나에게 말할 것이다.’라고 간접적으로 욥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36절에 지금 고통 받고 있는 욥의 고난이 더 길어지기를 원합니다. 욥은 악한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욥에 대한 엘리후의 평가는 37절에 나타난 바, 하나님을 거역하는 말을 많이 하는 악인인 겁니다.

    35장으로 넘어오면서 엘리후는 다시 한 번 욥의 말을 분석하려고 합니다. 1-3절에 엘리후는 욥이 결백하다고 주장하며 하나남께 자신의 고난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 합당하냐고 이의를 제기합니다. 욥이 자신의 의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어이없어합니다. 그러면서 5-7절을 통해 위대하신 하나님은 욥 당신과 같은 한 인간의 악행이나 경건한 삶에 영향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엘리후의 말은 사실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엘리후는 ‘위대하고 대단하신 하나님’을 이야기하지만, 만약 그렇게 대단한 하나님께서 왜 욥의 죄악에 대해서는 이렇게 잔인할 정도로 심판하시느냐고 욥의 입장에서는 되물을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이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엘리후의 주장도 모순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경도 쓰지 않으신다면 심판도 당연히 없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심판은 심판대로 하면서 각 개인에 대해 신경은 쓰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앞뒤가 맞지 않은 ‘모순덩어리 하나님’이 될 수밖에는 없는 겁니다.

    엘리후가 주장하는 말의 문제는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거듭해서 ‘반성적 지혜’와 ‘규범적 지혜’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는 점입니다. 35:1-10을 통해 엘리후는 욥에 대한 비판과 조언을 하기 위해 ‘반성적 지혜’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다시 11-13절에서는 ‘규범적 지혜’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시는 것은 사람이 헛된 것을 질문하기 때문이랍니다. 여기에서 엘리후가 말하는 헛된 질문은 11절에 제기되는 “땅의 짐승들보다도 우리를 더욱 지혜롭게 하시는 이가 어디 계시느냐?”입니다. 이런 질문은 교만한 악인이나 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직접 지혜를 가르쳐주신다는 주제와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주제는 ‘규범적 지혜’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이 말은 인간이 악한 교만으로 말미암아 부르짖지만 하나님이 이에 대답하지 않으실 때도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 탓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들의 부르짖음이 헛된 것이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엘리후는 지금 욥이 하나님께 부르짖고 항변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대답하지 않으시는 책임은 하나님이 아니라 욥에게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겁니다.

    엘리후는 이처럼 욥의 ‘반성적 지혜’에 대해 세 친구와 마찬가지로 ‘헛된 말’이며 ‘지식 없는 말’로 취급을 합니다. 그의 기준에서 욥은 교만한 악인들보다 더 헛된 말을 하는 사람인 겁니다. 그리고 15절에서 엘리후는 심지어 욥에 대한 하나님의 감찰이 다 끝나지도 않았다고까지 말합니다. 이 말은 욥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아직 다 안 끝났다는 뜻입니다. 욥은 억울하다고 하는데 엘리후는 이제 하나님의 징계는 시작에 불과한데 무슨 엄살이냐고 화를 돋우고 있는 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계속되는 엘리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결국 엘리후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자신이 생각하는 ‘생각의 틀’을 절대화하여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틀이 ‘최고’라고 생각하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요? 자신이 생각하는 틀에 비추어 볼 때, 맞지 않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악마화’합니다. 그러면서 ‘그럴 거면 계속해서 고난을 받으라.’는 악담도 서슴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결코 어떤 매뉴얼에 따라서 기계가 돌아가듯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엘리후와 같은 ‘차가운 신학’은 인생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돌아가는 기계 다루듯 합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는 ‘사람을 향하여 애타는 마음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이 머무실 자리는 없습니다. 같은 어려움이라도 환경과 신앙의 수준에 따라 대처하는 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고려하지 않은 채 천편일률적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잣대가 최고라 여기며 그것으로 재단한다면 어떠한 선한 것도 우리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엘리후가 처음 이야기를 시작할 때만해도 욥도, 욥기를 묵상하는 우리들도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결국 그가 제시하는 ‘제3의 지혜’가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지금 엘리후가 늘여 놓는 말들은 그저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고 악담만 해대는 ‘과도한 변론’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도 엘리후의 모습은 아닌지 다시 한 번 스스로 돌아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은 그 고통 중에 내어 뱉는 고통에 찬 말들을 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가운데에서 ‘내용’보다 그 말들 가운데 숨어 있는 ‘한숨’을 읽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많은 말로 고통 받는 자를 지치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고통의 터널을 지나는 지체들을 향하여 위로의 손길을 뻗어서 묵묵히 함께 해 줄 수 있는 ‘존재’로 옆에 있어주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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