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욥 36:1-25
◎ 제목: 고난에 대한 전문가는 없다.
1. 본문 개요
a. 욥 36:1-25 자신의 지혜에 대해 떠벌리는 엘리후
3. 관찰
a. 1-4절 엘리후 자신의 지혜에 대한 소개
b. 5-7절 규범적 지혜(1)- 선과 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c. 8-16절 규범적 지혜(2)- 회개와 깨달음을 위한 하나님의 징계
d. 17-25절 욥을 향한 조언-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라
2. 적용
욥의 세 친구들이 욥을 향하여 ‘세 번’에 걸쳐 말을 했던 것처럼, 엘리후도 총 세 번에 나누어서 자신의 말을 합니다. 엘리후의 마지막 발언은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36장부터 37장까지입니다. 엘리후는 마지막 발언을 통해 욥의 말을 비판하는 형식을 탈피하고 자신의 지혜를 본격적으로 설파합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36:1-25까지는 ‘규범적 지혜’에 해당하는 어휘와 주제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엘리후가 설파하는 지혜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면 남은 인생을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지만, 반면에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면 징벌을 받아 죽게 될 것이라는 ‘권선징악의 이분법’이 단순하고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는 2절에 ‘하나님에 대하여’ 욥에게 알려주고 싶은 지혜가 아직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시간을 달라고 합니다. 이런 표현을 통해 자신이 제시하려는 ‘제3의 지혜’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궁금함과 기대를 품게 만듭니다. 엘리후는 자신의 지혜의 출처를 3절에 ‘먼 데서’ 온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멀다’라는 단어는 장소적으로 이해한다면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낯설고 신비한 곳에서 자신의 지혜가 왔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 됩니다. 그러니까 ‘일반 사람이 잘 알 수 없는 신비한 지혜’라는 점을 부각시키는 겁니다. 혹은 ‘멀다’라는 단어가 시간적으로 이해한다면 아주 오랜 과거를 가리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는 규범적 지혜가 옛날에서 지혜의 출처를 찾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러면서 엘리후는 4절에 ‘이 나의 참된 지혜가 욥 그대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욥에게 그 지혜를 가르쳐 주려는 의지를 드러냅니다.
5절에 엘리후의 지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으로 시작됩니다. 그 위대하신 하나님은 그분의 지혜도 위대합니다. 이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그 위대한 지혜로 다스리는 세상은 ‘공의’로운 세상입니다. 그 공의로운 세상은 바로 ‘권선징악’이 실현되는 세상이지요. 6절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살려두지 않으시고 고난 받는 자에게 공의를 베푸십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의 시선은 늘 의인에게 고정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앞서 엘리후가 자신의 ‘제3의 지혜’를 본격적으로 말한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그가 지금 말하는 것은 세 친구들에게서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인과응보, 신상필벌의 원리입니다. 욥이 모르는 말이 있을까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또 반복합니다. 8-14절을 통해 엘리후는 이 ‘규범적 지혜’에 따라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어떻게 다루시는지 말합니다.
하나님이 족쇄와 환난의 줄을 통해 악인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담금질하고 정련하신답니다. 악행과 교만을 깨닫게 하십니다.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고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신답니다. 순종하면 살고 불순종하면 죽을 것이랍니다. 결국 엘리후는 이러한 상황 가운데에서 ‘의인’과 ‘악인’이 갈린다고 봅니다. 하나님이 주신 고통에 분노로 화답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는 악인은 결국 젊어서 죽고 생명은 남창과 함께 있게 된다는 겁니다. 결국 엘리후는 ‘욥! 당신이 바로 이런 사람이야!’라고 비난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엘리후는 15-16절의 말씀을 통해 욥으로 하여금 ‘당신은 곤고한 사람입니다.’라고 평가를 내립니다. 하나님은 그 곤고한 자를 구원하시고 학대 당할 즈음에 그의 귀를 여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대를 환난에서 이끌어 내셔서 좁지 않고 넉넉한 곳으로 옮기려 하실 것이고, 결국 무릇 그대의 상에 기름진 것이 놓인다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순순히 듣고 회개하라는 뜻이지요.
뒤이어 17-21절의 말씀을 통해 노골적으로 악인이 받을 벌이 욥 당신에게 가득하고 심판과 정의가 욥을 잡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분노하지 않도록 하랍니다. 쓸데없는 부르짖음이나 욥의 능력은 곤고한 가운데 전혀 당신을 유익하게 못한답니다. 밤을 사모하지 말고 악으로 치우치지 말라고 말합니다. 지금 하나님이 주신 환난을 달게 받고 회개해야 하는데 왜 자꾸 하나님한테 억울하다고 대드는 악행을 선택하느냐고 욥을 비난합니다.
엘리후가 말한 ‘제3의 지혜’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규범적 지혜의 일반론’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욥의 경우에 적용합니다. 욥이 당하는 고난을 보니, 그것은 분명 악인과 무지자에게 내려진 징벌이라는 겁니다. 욥의 세 친구들과 똑같은 말을 나열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려면 다음과 같은 악을 저지르면 안 된다는 거죠. 첫째, 돈에 눈이 멀면 안 되고, 둘째, 악이나 어둠 같은 부정적인 것을 추구하면 안 되며, 셋째,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그분을 찬양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합니다. 이 말을 가만히 듣고 있을 욥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세 친구들하고는 좀 무언가 다른 이야기를 할 줄 알고 조금은 기대를 했다가 다시 한 번 땅 저 밑으로 자신을 끌어 내리는 듯 한 절망감을 느낄 욥의 모습이 상상이 가십니까? 참으로 끔찍합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이 얼마나 높고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신 분인지를 갑자기 새삼스럽게 강조합니다. 22절이지요 하나님은 그의 권능으로 높이 계신답니다. 누가 그 같이 교훈을 베풀겠느냐라고 의름장을 놓습니다. 그렇게 대단한 하나님께 감히 불의를 행하였다고 대드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합니다. 지금 하나님께 불평할 때가 아니라 사람들이 찬양했던 그분의 일, 즉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유지시키신 그 놀라운 일을 기억할 때라고 합니다.
엘리후는 이미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전문가 노릇을 하고 있네요. 그리고 그는 자청하여 ‘고난의 전문가’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 엘리후는 잔인하리마치 욥을 향하여 독설을 퍼붓습니다. 욥을 다시 진단하며 엉터리 솔루션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울고 있는 사람에게 그만 울고 그만 슬퍼하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기억하라’고 떠들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시간이 갈수록 오만해 집니다. 2절 말씀에 ‘나를 잠깐 용납하라’는 말에도 정중함 보다는 오만함이 묻어납니다. 고난의 교훈을 거침없이 나열합니다. 이 ‘고난의 전문가’는 가르칠 줄은 아는데 교감할 줄 모르는 매정한 이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는 욥에 대하여 진단을 내리는 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에 대해서까지 진단을 내리는 듯합니다. 심지어 지금 엘리후, 그의 도움 없이는 하나님은 스스로 변증하실 수조차 없는 것처럼 ‘의를 돌려놓겠다.’고 맹랑하게 발언을 이어갑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국 그렇게 모든 것에 통달한 듯 떠들어 대지만 정작 하나님이 고난을 주신 이유를 정말 모르고 있는 사람은 욥이 아니라 엘리후입니다. 엘리후는 인과응보를 말하던 다른 세 친구들을 책망했지만 그 역시 욥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고, 결국 그 세 친구들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선입견으로 똘똘 뭉친 엘리후의 모습입니다.
나침반은 목적지의 방향은 알려주지만 그 목적지로 가는 지형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습니다. ‘보편성의 인과응보의 원리’라는 ‘나침판’은 결코 영문 모를 시련으로 내상을 입고 피폐해진 욥과 같은 이의 개별성과 특수성이라는 ‘지형’을 알려줄 리 만무합니다. 속단해서는 안 됩니다. 늘 신중하게 고통 받는 이의 상황과 형편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준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