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욥 36:26-37:24

◎ 본문: 욥 36:26-37:24
◎ 제목: 왜곡된 신념

1. 본문 개요
    a. 욥 36:26-37:24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는 엘리후

2. 관찰
    a. 36:26-37:13           반성적 지혜- 창조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대하심
    b. 37:14-24           규범적 지혜와 반성적 지혜의 종합- 놀라운 일을 깨달으라

2. 적용
    욥기에서 욥이 계속해서 말해 왔던 ‘반성적 지혜’는 “규범적 지혜의 원리가 기계적으로 항상 적용되는가?”와 “이 세상이 정말 선명하게 이분법적으로 모든 것이 나뉘는가?”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지혜를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성적 지혜는 인간의 활동 영역이나 이해 범위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선과 악, 옳고 그름으로 따질 수 없는 것들을 두고 깊이 있게 생각하고 고민해 보아야 한다고 우리를 설득합니다.

    엘리후는 어제 새벽에 함께 살펴보았던 36:1-25절을 통해 ‘권선징악의 원리, 즉 규범적 지혜’로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36:26-37:24에서는 시야를 하늘로 돌립니다. 26절에 ‘하나님은 높으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의 햇수를 헤아릴 수 없다.’는 진술을 하면서 이제 ‘반성적 지혜’로 자신의 주제가 전환되었음을 알립니다. 하나님의 크심과 인간의 작음을 대비하면서 인간이 인식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지적합니다.

    엘리후는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작 엘리후 자신은 이후에 이어지는 진술을 통해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영역이 어떠한 방식으로 움직이는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알 수 없는데, 어떻게 엘리후 자신은 알 수 있는 것일까요? 모순일 수밖에 없습니다. 27-28절은 ‘비의 순환’을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29절에 ‘겹겹이 쌓인 구름과 그의 장맛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깨달으랴’라고 말하면서 인간의 한계를 언급하는데 정작 자신은 아주 잘 깨닫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32-33절에는 모든 생명체를 굽어 살피셔서 모두가 먹을 수 있도록 비를 주시고, 번갯불과 천둥도 다 그분께서 조종하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비가 내리고 안 내리는 것을 ‘옳고 그름의 차원’에서 접근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비가 의인들에게만 내리고 악인들에게는 안 내리는 그런 선별적 현상이 아니라는 점도 강조합니다. 해와 비는 결코 ‘선인과 악인,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37장으로 넘어와서도 엘리후는 ‘번개와 천둥’에 대한 주제를 계속 이어갑니다. 2절을 보시면 엘리후는 천둥소리를 ‘하나님의 소리’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자연현상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사람들에게 촉구합니다. 그 소리는 1절에 나타나는바 마음을 떨리게 하고, 그 자리를 흔들거리게 만들 정도로 대단한 것입니다. 4절에 그 두려운 소리가 온 세상에 퍼지도록 하나님은 천둥과 번개를 아끼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엘리후는 5절에서 앞선 36:26과 29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다시 한 번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소리를 발하시기 때문에 그 분이 행하시는 일을 인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그분이 행하시는 일을 인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음에도 엘리후는 그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6절에 눈도, 적은 비와 큰 비도 ’내리게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그러면 7절에 나타난 것처럼 인간은 꼼짝없이 눈이나 비, 폭우를 맞을 수밖에 없고,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당신이 하시는 것이라는 걸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8절에 이렇게 눈이나 폭우가 내리면 동물들은 각자 은신처로 가서 몸을 피합니다.

    9절에는 거센 바람이 북쪽에서 몰려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숨을 내쉬셔서 그런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 분이 거센 바람을 보내면 10절에 엄청나게 큰 강물도 얼어붙고 맙니다. 그리고 11-12절에서는 다시 한 번 구름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하는데, 구름은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대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움직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에 대하여 엘리후는 13절에 ‘혹은 징계를 위하여 혹은 땅을 위하여 혹은 긍휼을 위해서’라고 언급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우리는 어떤 비가 ’징계‘에 해당하고 또 어떤 비가 ’긍휼‘에 해당하는지, 아니면 그냥 자연 전체의 생명을 위해 그러는 것인지를 누가 판단하느냐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엘리후는 그에 대한 답을 피합니다.

    이제 37:14-24절에서 엘리후는 ‘규범적 지혜와 반성적 지혜’를 통합합니다. 엘리후는 14절에 욥을 향하여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깨달으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오묘한 일’로 번역한 히브리어 ‘니플라오트’는 인간이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가리키는 반성적 지혜의 대표적인 단어이면서, 욥기 전체의 핵심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러하기에 ‘엘리후’는 지금 욥에게 불가능 한 것을 질문합니다. ‘알 수 없는 것을 그대는 아느냐?’라고 묻는데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지요.

    엘리후는 계속해서 질문합니다. 15절에 ‘하나님이 어떻게 번갯불을 움직이시는지 당신은 아느냐고 묻습니다. 16절에서는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지식을 당신이 소유했는지를 또 묻고요. 18절에서는 심지어 욥에게 저 하늘을 창조하는 일에 참여했냐고 까지 묻기까지 합니다.

    지금 엘리후가 하고 있는 질문의 형식은 뒤에 38장 이하에 나오는 ‘하나님의 질문 형식’과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질문을 당연히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엘리후는 스스로도 앞선 33:6절에서 욥과 동일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스스로를 규정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겁니까? 엘리후 자신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존재라는 겁니까? 자신은 하나님에 방불한 자인가요? 그렇다면 엘리후는 하나님의 창조 작업에 직접 참여했습니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엘리후가 지금 욥을 향하여 하고 있는 일은 스스로 하나님인 척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엘리후가 정말 다 안다면 왜 욥기 1-2장의 천상회의를 모를까요? 만약 그가 하나님과 사탄의 내기를 알았다면, 지금과 똑같이 욥에게 말을 했을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같은 말이라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과 사람이 하는 것’은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결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똑같이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마지막 23-24절에 나타나는 엘리후의 최종 발언은 ‘정의’와 ‘공의’,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인간의 ’겸손‘입니다. 이것은 ’규범적 지혜‘에 속한 단어들이지요. 엘리후는 오늘 본문 36:26절부터 화려하게 자연현상을 묘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묘사한 자연현상은 ’정의와 공의‘라는 개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24절에 ’하나님은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모든 자를 무시하신다.‘고 엘리후가 자기 입으로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 일이 그대로 실현됩니다. 엘리후의 말에 아무도 반응하지 않으니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말이든 ‘무슨 주의’가 붙으면 독선적인 신념이 되어 버립니다. 신앙도 예외는 아닙니다. ‘하나님 중심’과 ‘하나님 주의’는 엄연히 다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엘리후의 자부심은 결국 나만 ‘옳다’는 독단적 확신으로 변했고, 그것은 왜곡된 신념이 되어 ‘다른 이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집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위로하겠다.’는 심정으로 욥에게 나아 왔지만 그 가운데 ‘고통을 해석하려는 욕망’이 끼어들자, ‘재판관’이 되어버렸고 관계는 망가졌습니다. 엘리후의 확고한 신념 역시 하나님과의 위태로운 결속마저 산산이 깨뜨려버리고 고통만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종교와 신념과 사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과 어떻게 함께 연대하여 공감하는가라는 사실이란 것을 말입니다. ‘해석의 전문가’가 되려고 하지 말고 ‘고통 받는 자의 이웃’이 되어야겠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상처를 싸매어 주고, 치료해 줄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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