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욥기 38:1-18

◎ 본문: 욥 38:1-18
◎ 제목: 질문하시는 하나님

1. 본문 개요
    a. 욥 38:1-18           침묵을 깨고 욥을 향해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는 하나님

2. 관찰
    a. 1-3절           여호와의 질문
    b. 4-18절           인간의 시간적, 공간적 한계에 대비되는 한계가 없으신 하나님

2. 적용
    드디어 욥과 친구들의 오랜 논쟁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 등장합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지요. 욥이 왜 고난을 당하고 있는지, 누구 말이 맞고 누구 말이 틀렸는지를 확실하게 판단해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마음으로 생각을 해보면, 이제 하나님께서 오셔서 무언가 말을 하신다면 욥의 편에서 그를 변호해 주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가는 가운데 ‘왜 욥이 고난을 받고 있는가’에 대한 충분하고 명시적인 대답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왜 욥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계시지?’라는 생각마저 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계속해서 나열됩니다.

    하나님께서는 38-41장을 통해서 총 ‘두 번’의 발언을 이어가십니다. 그 가운데 첫 번째 발언은 38:1-39:30절입니다. 그 첫 번째 발언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부분이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보고 있는 38:1-18입니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3절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지혜로 초청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4-18절을 통해 하나님의 반성적 지혜가 펼쳐지는데, 특별히 ‘하나님의 크심과 인간의 작음’을 대비하여 그 지혜를 설명하십니다.

    본문 1절에 하나님께서는 ‘폭풍우 가운데’ 임하십니다. 폭풍우로 번역된 히브리어 ‘세아라’는 회오리바람같이 강하고 거센 바람을 가리킵니다. 일상적인 바람과는 다르고, 또 언제 어떤 방식으로 부는지 예측이 가능한 바람을 의미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현현’을 나타내는 데 주로 사용되는 자연현상입니다. 인간을 압도하는 하나님의 등장이며,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2절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시는데,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질문’의 형식으로 첫 마디를 떼십니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라고 질문하심으로 무언가 지금까지의 답답한 상황에 대해 ‘대답’을 기대했던 이들을 당황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누구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욥’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욥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발언을 한 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까지 ‘엘리후의 장광설’이 가로막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금 욥에게만 말씀하신다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2절의 ‘누구냐?’는 ‘지식 없는 말들’로 하나님이 운행하시는 원리 혹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원리에 대해 잘못 이야기하는 자에 대한 ‘누구냐?’입니다. 바로 ‘누구냐?’의 대상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가 어떠한 원리로 움직이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어낸 사람일 겁니다.

    우리는 2절을 읽으면서 무엇에 초점을 자연스럽게 맞추게 될까요? 그렇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질문하시는 대상이 과연 ‘욥’입니까? 아니면 ‘세 친구 혹은 엘리후’입니까?라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겠지요.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질문을 ‘누구에게’ 했느냐가 아니라 질문의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3절에서 당당하게 한판 붙어보자고 지혜의 대결로 초청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지혜인데, 지혜에 있어서 하나님과 견줄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지금 하나님은 ‘싸움’을 거시는 것 같지만, 이 싸움은 싸움 자체가 되지 않는 싸움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가르침에 고개 숙이고 경청해야 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일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욥에게 나타나셨든 지금 욥은 어떤 마음일까요? 하나님께서 대답을 해 주시든, 질문을 해 주시든 지금 욥은 자신이 바라던 바가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대답하신다는 것만으로 욥은 자신이 버림받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의 모든 예상을 깨고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 여겼던 욥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것 자체가 이미 욥의 간구를 들으신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욥은 살 것 같았을 겁니다. 자기 말이 틀려도 좋고 자기 생각이 잘못되었어도 좋다고 여겼을 겁니다. 이제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셔도 다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상대해 주셨다는 사실만으로 욥은 위로를 받았을 겁니다.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 오늘 욥의 마음으로 매 순간 살아감이 옳을 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기도하는 자리에서 가져야 할 태도가 오늘 욥이 마음에 품게 되는 자세입니다. 우리는 ‘내가 하나님의 존전 앞에 있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기도의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있게 만나면 그까짓 것 내가 구하는 것 하나도 안 들어 주셔도 상관없다는 마음이 바로 ‘바르게 기도하는 마음’이라는 겁니다. 아무리 내가 기도하는 대로 모든 것이 다 응답 되고 탄탄대로가 열려도 ‘하나님을 대면하는 삶’이 없다면 그것은 ‘공허한 성취’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어쩌면 다 망한 것 같고, 고통과 고난의 연속인 삶이라 할지라도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해라.’고 말씀해주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수지맞은 인생입니다. 우리의 존재 목적 자체가 ‘하나님과의 교제함’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늘 나를 만나 주시고, 나에게 말씀해 주시기를 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4-18절은 ‘인간의 한계’에 대해 하나님께서 지적하시는 내용입니다. 4-12절까지는 ‘인간의 시간적 한계’를 언급하십니다. 너희들 가운데 내가 천지를 창조할 때 거기에 있었던 사람이 있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런데 사실 ‘누가 그 자리에 있었느냐’라는 물음은 무언가 대답을 얻거나 욥에게 정답 가르쳐주려는 질문이 아닙니다. 또한 이 질문은 욥 뿐만 아니라 세 친구와 엘리후, 그리고 지금 이 욥기를 읽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천지창조의 때에 존재했던 인간은 없으니까요. 정작 중요한 것은 이것이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에 대한 언급이라는 겁니다. 인간의 존재적 한계를 드러내는 질문이라는 말이지요. 그러하기에 이 ‘하나님의 질문’ 앞에 어느 누구도 감히 대답을 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질문의 의도입니다.

    12-18절에서는 ‘인간의 공간적 한계’를 언급합니다. 인간은 결코 바다의 심연과 같은 ‘물리적인 공간’에 대해서도 ‘죽음의 세계’와 같은 ‘영적인 공간’에 대해서도 ‘존재의 한계’가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어디든지 무소부재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거죠.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서 인간이 경험하지 못하는 공간이 아주 많이 있다는 것은 그 모든 세계가 어떠한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인간이 다 ‘아는 척’ 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결국 하나님께서 하고 계시는 작업은 인간의 시간적, 공간적 한계에 대한 설명을 하시면서 계속해서 욥기를 통해 이어졌던 ‘무죄한 자의 고난’이라는 소재와 나란히 두신다는 겁니다. 그 일을 통해 우리가 알고 경험하는 세계가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극히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이 어떠한 방식으로 움직이시는지 인간이 무지한 말로 어둡게 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이 새벽에 세상에 가득찬 ‘하나님의 창조와 모든 만물을 운행하시는 주님의 주권’의 신비로움을 보는 ‘영안’이 열리게 해달라고 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금도 질문하심으로 온 우주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기를 원하십니다. 내 인생에 어떠한 고난과 고통을 통해서도 하나님 자신의 섭리와 뜻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크심을 신뢰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반응하는 인생이 되게 해 달라고 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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