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욥기 38:39-39:30

◎ 본문: 욥기 38:39-39:30
◎ 제목: 해체시키시는 하나님

1. 본문 개요
    욥 38:39-39:30           동물들을 통해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지혜

2. 본문 관찰
    a. 38:39-41           암사자와 까마귀를 통한 하나님의 교훈
    b. 39:1-4           산염소와 암사슴을 통한 하나님의 교훈
    c. 39:5-12           들나귀와 들소를 통한 하나님의 교훈
    d. 39:13-25           타조와 말을 통한 하나님의 교훈
    e. 39:26-30           매와 독수리를 통한 하나님의 교훈

3. 적용
    38장부터 하나님은 욥을 향하여 ‘너는 아무개에 대해서 아느냐?’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이어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선 38:1-38절까지의 내용을 통해 ‘시 공간과 우주, 그리고 지구의 이모저모’와 관련한 ‘인간의 무지함’에 대해 철저하게 다루십니다. 묻는 질문마다 인간의 차원에서는 대답할 수 없는 내용들입니다. 그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은 철저하게 ‘반성적 지혜’를 설명하고 계시는 겁니다.

    규범적 지혜는 철저하기 ‘이분법적 세계관’을 가지게 마련입니다. 지혜와 무지, 선과 악, 옳고 그름 등으로 나뉩니다. 그 가운데 ‘정결과 부정’도 이분법이지요. 이 이분법에 따르면 ‘정결한 것은 좋은 것이고 부정한 것은 나쁜 것’이라는 가치가 매겨집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본문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다 부정한 짐승들입니다. 까마귀도 부정한 짐승들이고, 사체를 먹는 매와 독수리는 말할 것도 없지요. 그런데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반문해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이 동물들이 나쁜 동물들인가?’라고 말입니다. 이 질문이 다름 아닌 ‘반성적 지혜’가 던지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에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모두 태우라고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좋은 짐승’들만 골라서 태우지 않았을까요? 부정한 짐승들이라면 홍수라는 기회에 다 없애면 좋지 않았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제사를 드리기에 합당한 의미에서 정결과 부정의 개념이지, 좋고 나쁨을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부정한 짐승’들을 예로 들어서 하나님의 ‘반성적 지혜’를 가르치십니다.

    하나님께서 언급하시는 첫 번째 동물은 ‘사자와 까마귀’입니다. 38장의 가장 말미에 이 두 동물이 나옵니다. 먼저 사자입니다. 배가 고픈 야생의 사자가 굴 앞이나 풀숲에 엎드려 사냥감을 노리고 있는데 그 근처에 가서 먹이를 놔주고 올 담력 있는 사람이 대체 얼마나 되겠습니까?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니까요. 다음은 까마귀입니다.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언급하시는 것은 부정하다 여기는 이런 새들조차 먹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인간 생활 영역 안에서 인간의 보호를 받아야만 생명이 유지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고 계십니다.

    39:1-4에는 산 염소와 암사슴을 언급합니다. 그냥 염소는 ‘가축’으로 인간의 영역 안에 포함되지만, 산 염소는 인간의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에서 이 두 짐승의 임신 기간에 대해 하나님께서 알려주려고 하시는 건 아닙니다. 중요한 건 4절에 나오는 ‘빈 들’입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공간에서 산 염소와 암사습의 새끼들이 성장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불과 몇 달 되지 않아 어미를 떠나 독립적으로 살아간다는 거죠. 인간이 먹이고 입히지 않아도 그들은 잘만 살아간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강조하십니다.

    5-12절에는 들 나귀와 들소가 나타납니다. 역시 ‘나귀와 소’는 가축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야생의 ‘들 나귀와 들소’를 말씀하십니다. 야생나귀는 원래 자유롭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매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영위할 수 없는 ‘소금 땅과 사막’을 야생나귀의 거처로 주셨습니다.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지요. 가축을 치는 사람이 자신의 나귀에게 일을 시키는 것은 야생나귀에게는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들 나귀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든 상관없이 목초지를 찾아 이 산 저 산을 두루 다닙니다. 들소도 마찬가지입니다. 11-12절에 나타나는바 그들이 아무리 힘이 좋아도 사람이 그것에게 일을 시킬 수 없고, 들소가 논밭의 추수를 도울 리 만무합니다.

    13-25절에는 ‘타조와 말’이 언급됩니다. 타조는 ‘지혜 없는 동물’로 그려집니다. 날지도 못하고 나무 위나 덤불 속에 둥지를 만들어 자기 알을 보호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땅바닥에 알을 낳아 흙으로 덮어 둘 뿐입니다. 누가 지나가다 발에 밟힐까 걱정인데, 타조는 신경도 안 씁니다. 왜냐하면 17절에 하나님께서 타조에게 그런 ‘지혜와 명철’을 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지혜와 명철이 없는 타조가 멸종했느냐는 거죠. 그런 것 없이도 잘 만 살아간다는 겁니다. 말을 타고 전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지혜와 명철’이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타조는 그런 기마와 기병을 보고 비웃을 뿐입니다. 사람들이 그 귀한 지혜와 명철로 전쟁을 벌이는 것이 타조에게는 미련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요. 더불어 18-25절에 나오는 ‘말’은 야생마가 아니라 ‘군대에 쓰인 기마’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인간 생활 내부에 존재하는 동물입니다. 여기에서 비교대상은 말과 인간, 즉 군인들입니다. 적과 맞서는 상황에서 창과 화살이 빗발칠 때 군인들은 무서워 걸음을 멈추고 도망갈 수도 있지만, 말은 두려움이나 겁을 모른다는 겁니다. 적들의 나팔소리에도 멈추지 않고 세차게 땅을 박차고 나갑니다. 22절에 나타나는 ‘두려움과 공포’는 욥과 친구들 사이의 대화에서 자주 언급된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그러나 16절과 22절에 언급되는 타조와 말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과의 차이점이라는 겁니다. 사람이 사는 공간 안에는 ‘규범적 지혜’가 필요할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필요 없는 공간도 이 창조세계 안에서는 존재한다는 겁니다. 두려움과 공포가 인간의 행동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는 요소 중 하나이겠지만, 그런 두려움과 공포가 없이도 잘 살아가는 피조물들도 있다는 겁니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이 꼭 다른 존재에게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님은 설명하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매와 독수리가 26-30절에 등장합니다. ‘매와 독수리가 둥지를 트는데 인간의 지혜가 필요한가? 인간이 일일이 지시해서 그렇게 높은 곳에 둥지를 만든 것인가?’라고 하나님은 물으십니다. 독수리는 사람의 계획 따위에는 안중에도 없다는 거죠. 또한 피를 철철 흘리는 사체를 먹는 것은 인간의 기준에서는 부정하기 이를 데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독수리들에게 이러한 정결과 부정의 이분법은 전혀 무관한 일입니다. 인간이 목숨을 걸 만큼 중요한 것들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세계가 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예를 들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욥’의 시선을 ‘자신의 고난’에만 머물게 하심이 아니라 그의 시선을 창조 세계 구석구석으로 이끄십니다. 욥이 ‘까닭 없는 고난’을 당한 것은 맞지만, 그 고난으로 인하여 좁아져서 자신의 상황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의심한 시각이 얼마나 제한적이었는지를 직접적으로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더불어 욥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간접적으로 ‘세 친구들과 엘리후’에게도 전달되어서 그들이 얼마나 편협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하여 접근하였는지를 깨닫고 회개할 기회를 주고 계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질문하시는 것들은 그렇게 하나 같이 우리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생각할 수도 접근할 수도 없는 것들임을 다시 한 번 묵상하는 가운데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출산의 고통 없이는 생명이 없습니다. 생일을 저주할 만큼 고통스러웠던 욥의 인생은 ‘또 하나의 창조’라 불릴 만큼 욥으로 하여금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게 만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명 한명을 부르시고, 회심하여 새롭게 하신 후에 고난의 심연을 거쳐 우리를 더욱 깊은 신앙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욥이 42:5절에 “주님을 귀로만 듣다가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하는 놀라운 변화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신앙의 여정의 마지막에도 하나님을 향한 놀라운 변화로 말미암는 믿음의 고백으로 가득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참 믿음의 백성으로 매일같이 성숙해 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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