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욥기 40:1-24
◎ 제목: 깨어나게 하시는 하나님
1. 본문 개요
욥 40:1-24 하나님의 두번째 연설의 전반부
2. 본문 관찰
a. 1-5절 하나님의 질문과 욥의 답변
b. 6-14절 하나님의 두 번재 연설이 시작 됨
c. 15-24절 베헤못에 대하여
3. 적용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후반부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함께 살펴보고 있는 본문 40:1-24절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1-4절은 하나님께서 38장부터 계속해서 해 오시던 말씀을 잠시 멈추고 욥에게 집중하여 질문하시자 그 질문에 대해 대답하는 욥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6-14절은 하나님께서 두 번째 연설을 이어가시는데 그 서론 격으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말씀을 하신 다음, 15-24절에서는 ‘베헤못’이라는 한 동물에 대해 설명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선 38장부터 39장까지 모든 시공간과 우주, 그리고 지구의 기후와 피조물들에 대하여 인간의 차원에서는 도무지 답을 내어 놓을 수 없는 질문을 계속해서 이어오셨습니다. 그 질문들을 잠시 멈추고 하나님은 욥 개인에게 집중하셔서 2절에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라고 추궁하듯이 질문하시고 대답을 촉구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원어 성경을 보면 2절의 내용이 조금 다르게 다가옵니다. 먼저 ‘트집 잡는 자’로 번역된 단어 ‘리브’는 ‘말다툼하다, 논쟁하다.’라는 의미로, 재판을 요청하거나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의미로 흔히 쓰이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트집을 잡는 자’라기 보다는 ‘변론하는 자, 송사하는 자’로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고 ‘탓하는 자’로 번역된 단어 ‘야카흐’도 역시 법정 용어로 ‘징계, 책망, 판결자’ 등의 의미를 가집니다. 즉 소송 당사자들 사이에 옳고 그름을 가리기 위해 변론하거나, 아니면 그 사이를 중재하거나 혹은 판결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다투다’로 번역한 ‘잇소르’라는 단어도 ‘훈계’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생각이나 행동을 바르게 바꾸는 것을 뜻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놓고 히브리 원어대로 직역을 해보면 ‘전능하신 분과 논쟁하여 그를 바꿀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가르치려는 자가 있으면 여기에 답해 보라.’ 정도가 될 겁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하나님은 욥의 ‘태도’의 문제를 지적하시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인 나, 전능자인 나와 법정소송을 해 보려고 하느냐?’라고 물으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욥이 하나님을 부당하게 트집 잡고 원망하는 부분을 지적하면서 꾸짖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져 ‘지금까지 내가 말했던 반성적 지혜의 깊은 뜻을 듣고도 그렇게 소송을 걸어보려고 하느냐?’라고 물으시는 겁니다.
욥은 당장 4절에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겠습니까? 내 손으로 입을 가릴 뿐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경솔했음을 인정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 개역개정 성경의 번역으로는 욥이 ’하나님에 대해 트집이나 잡는 불신앙‘에 빠졌다고 오해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불신앙과는 다른 겁니다. 욥이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맞지만, 자신의 괴로움과 억울함을 토로했을 뿐이고 또한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렸을 뿐이지 하나님을 버리지도 또 덮어놓고 믿는 척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6-14절의 말씀을 통해 욥을 향해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를 부정하려느냐?’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욥에게 악을 일망타진해서 의를 세워 보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에서는 욥을 향해 ‘자기 의를 세우려’하는 부분에 대한 책망을 하시지만, 앞선 욥기 1-2장에서는 욥이 의롭게 살았다고 평가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둘을 어떻게 나란히 둘 수 있나요?
결국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공의를 실천하고 계셨기 때문에 욥이 자신의 공의를 행할 수 있었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악의 범람을 허용하셨다면 욥은 악을 이겨가면서 정의를 실현할 수조차 없었고 이렇게 하나님께 항의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거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어느 것 하나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우리의 숨 쉬는 존재 자체도, 우리가 선을 행하는 것도,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욥을 향한 하나님의 발언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15절부터 주제를 ‘베헤못’으로 옮겨 가십니다. 그리고 내일 살펴볼 ‘리워야단’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하나님 당신의 최후 진술을 마무리하시지요. 구판 성경인 개역한글판에서는 ‘하마’로 번역했고, 개역개정판에서는 히브리어를 그대로 음역하여 ‘베헤못’이 되었습니다. 이 동물은 15절에 소처럼 채식을 한답니다. 16절에 따르면 힘이 넘치는 허리와 복근을 가지며, 17절에는 꼬리가 백향목처럼 튼실하게 달려 있고 허벅지의 힘줄은 서로 단단히 얽혀 있다고 말합니다. 18절에서는 엄청난 통 뼈인 골격들이 마치 구리관 같고 갈비뼈는 쇠막대기 같다고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베헤못’은 하마를 상상하시면 되는데, 17절에 꼬리가 백향목 같다는 부분 때문에 몇몇 학자들은 이 베헤못이 ‘공룡’을 묘사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동물이 정확하게 무엇을 지칭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베헤못을 묘사하시면서 하고자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이 베헤못을 ‘내가 너를 지은 것 같이 그것도 지었다.’는 사실입니다. 피조물이라는 거죠.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점에서, 당대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로 엄청난 존재인 베헤못이지만, 그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두 번째는 베헤못이 19절에 하나님이 만드신 것 중에 으뜸이라고 언급되는데요.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중에 으뜸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38-39장의 내용을 통해 인간 존재의 한계와 인식의 한계에 대해 거듭 말씀해 오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헤못이라는 피조물의 존재는 인간의 보잘것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베헤못이 어떤 동물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베헤못’은 동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인간에게 적대적인 세력’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이렇게 인간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존재들조차도 하나님의 손에서 질서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고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상대적으로 욥의 협소한 세계 이해를 지적하시는 겁니다. 이 세상의 악한 사람들을 통제하시면서 의인들을 만들어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가르쳐주시고 싶으신 겁니다.
하나님의 혼돈 속에서도 질서와 조화와 아름다움을 창조하시는 주권적 역사는 너무나 신비롭습니다. 그 신비를 알고 수용하기에는 욥의 이해의 폭은 좁고 짧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겪은 고통 또한 너무나 심했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고통스러운 현실에 갇히게 되면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따위에는 관심도 가지기 어렵습니다. 그 고통에 허덕이며 헤어 나오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가 되어 버리니까요. 그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의 경계와 한계, 최후까지도 다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입니다.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끝장을 보시고, 결자해지 해 주실 것을 신뢰하면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 가운데에서도 이겨낼 힘과 용기를 얻게 될 줄로 믿습니다. 늘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