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욥기 41:1-34

◎ 본문: 욥 41:1-34
◎ 제목: 세상보다 더 크신 하나님

1. 본문 개요
    a. 욥 41:1-34           하나님의 두번째 말씀의 후반부


2. 본문 관찰
    a. 1-8절           리워야단과 인간의 한계
    b. 9-12절           하나님의 위대하심
    c. 13-34절           리워야단에 대한 묘사


3. 적용
    우리가 욥기를 대하면서 ‘세 친구들과 엘리후가 욥을 정죄하고 욥과 변론하는 장면’을 읽다보면, 만약 이들이 1-2장에 나오는 천상회의를 살짝이라도 알게 된다면 창피해서 고개를 못 들 것이라는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38장부터 등장하셔서 사실상 천상회의 내용을 먼저 조금만 언급을 해 주셨으면 정말 통쾌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지요. 하지만 사실 욥기의 하나님은 ‘왜 욥이 고난을 당한 것인지’에 대해 설명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일단 우리 독자들은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그것을 설명할 이유는 없다는 겁니다. 욥기의 목표는 욥기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설득하는데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욥기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맞습니다. ‘무죄한 자의 고난’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인간의 한계와 인간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경험에 의해 축적된 패턴, 즉 ‘규범적 지혜’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는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은 정확하게 그 주제에 부합합니다.

    오늘 41장의 하나님의 말씀은 ‘리워야단’으로 시작해서, ‘리워야단’으로 끝난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리워야단은 악어를 상상하시면 되겠습니다. 실제로 구판 성경인 ‘개역한글판’에는 ‘악어’라고 번역한 것을 개정판에서 ‘리워야단’으로 바꾸었습니다. 우리는 1-8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왜 ‘리워야단’이라는 동물을 소재로 사용하셨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질문들을 만나게 됩니다. “너는 낚시로 리워야단을 낚을 수 있느냐? 밧줄로 그 혀를 움직이지 못하게 묶을 수 있느냐? 그 코에 줄을 꿰고 갈고리로 턱을 꿸 수 있느냐? 창과 작살로 그것을 찌를 수 있느냐? 그러면 그것이 네게 한 번 만 살려달라고 비굴하게 애걸할거 같으냐? 너는 그것과 노예 계약을 맺을 수 있느냐? 그걸 가지고 노는 모습을 여자애들한테 자랑 삼아 보여줄 수 있겠느냐? 과연 어부나 상인들이 그것을 잡아다가 시장에 내다 팔 수 있겠느냐? 손으고 그걸 건드리면 어떤 사달이 날지 상상해 본다면 감히 만질 엄두도 못 낼 것이다.” 이 모든 질문들이 가지고 있는 구조와 핵심내용은 똑같습니다. 모두 인간과 리워야단을 대조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대조의 목적은 그 앞에서 인간이 무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욥을 향하여 하시는 질문이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께서는 욥의 입에서 ‘할 수 없습니다.’라는 대답이 나올 수밖에 없는 질문만 골라서 하시는 택입니다. 리워야단 앞에서 욥은 속수무책인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리워야단’은 어제 살펴본 ‘베헤못’과 그냥 동물일 수도 있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나 조건을 비유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욥은 지금까지 ‘리워야단’의 존재와 상관없이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욥이 당한 ‘무죄한 자에게 닥친 고난’은 이런 리워야단이 잠시 기존의 한도를 넘어서 활동하게 되었을 때에 초래된 결과라고 볼 수 있지요. 그 상황을 욥은 몸소 경험하였습니다. 리워야단을 인간은 이길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리워야단’을 통제하시는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욥은 지금까지 그런 하나님 아래서 살아 왔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리워야단을 통제하시기도 하시지만, 지금 욥에게 닥친 고난처럼 그 고삐를 풀어버리기도 하신다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꼭 그렇게 하셔야 해서 되어진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그 하나님의 자유를 인간인 욥은 맘대로 재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욥은 처음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은 앞선 40:5절에서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욥이 이렇게 말한 것은 하나님의 질문에 대해 이미 욥이 정확하게 대답해 왔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하실 자유가 있으신 분이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이해되지 않는 고난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그것에 대해 왈가왈부 할 수 없다.’는 바른 대답을 하나님께 하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이 욥의 대답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도 동일하게 붙잡고 나아가야 하는 고백이라는 사실을 이 새벽이 기억하여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 중심적으로 보면 ‘베헤못이나 리워야단’ 같은 혼돈의 존재는 창조의 질서와 모순되어 보이기에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안에서는 창조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사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뉴스 가운데 전달되는 수많은 ‘악의 사례’들을 보면서 악인들의 존재, 악한 단체나 무리들이 저지르는 죄악을 보면서 경악합니다. 하지만 결코 그 존재들이 하나님과 창조 세계에 위협이 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우리는 분명한 믿음으로 붙잡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악인, 혹은 혼돈의 세력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에 그 악인들의 존재는 오히려 영원히 견고한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를 세울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워가는데 기여하게 되는 것이지요.

    9-12절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인간의 보잘것없음’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주는 반성적 지혜를 설명하신 후에, 13-34절은 다시 ‘리워야단’에 대한 묘사로 이어집니다. 큰 입을 쩍벌리는 모습, 입과 코에서 불과 연기가 발산되는 모습 등 리워야단의 외양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두꺼운 목과 튼튼한 근육, 단단한 껍질로 인해 칼과 창, 표창과 작살, 화살과 돌팔매로 아무리 공격해도 조금의 피해도 입히지 못하는 리워야단의 강력함을 묘사합니다. 반면에 인간에게는 이런 무기들이 치명상을 입힐 수 있겠지요. 인간과 리워야단의 비교를 통해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단순한 사실입니다. 이 땅에서 이것을 다스릴 사람은 아무도 없고, 제아무리 잘나고 대단한 인간이라도 리워야단은 그보다 위에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욥’으로 대표되는 우리 인생들을 향하여 인간의 기준과 필요를 뛰어넘어 피조세계 전체를 다스리시는 창조의 권능과 지혜를 믿어야 함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욥은 비록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마주한 극심한 고난으로 인해 제한된 시각으로 자신의 상황만을 기준삼아 판단하고 의심하였습니다. 그는 리워야단을 포획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인간은 ‘저 악의 세력을 당장 궤멸시킬 수 있는 능력’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런 능력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능력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무너지거나 실패하는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 가운데 ‘죄’가 들어오는 순간부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쩌면 ‘혼돈’이고 ‘어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 우리를 ‘빛’으로 부르셨지만, 우리는 여전히 ‘어둠과 혼돈’ 가운데에 살아야 하는 ‘사명’이 있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우리는 ‘빛’으로 부르시고는 ‘빛의 자녀’처럼 이 어둠과 혼돈 속에서 살아 내기를 요청하십니다. 이 혼돈 속에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거죠. 우리는 ‘어둠’에 지는 존재가 아니라 그 어둠 가운데에서 ‘빛의 자녀’로 살아냄으로 말미암아 ‘빛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는 삶을 살아낼 사명이 있다는 겁니다.

    이 새벽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그 사명의 자리로 부르신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고난 없이는 거룩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는 부활이 없고, 죽음 없는 생명은 없습니다. 흑암은 깊을수록 빛은 더욱 찬란히 빛나게 됩니다. 리워야단과 같은 어둠의 존재 속에서도 이겨내고 더욱 주님의 빛을 발하는 ‘성화의 삶’을 살아냄으로 말미암아 세상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는데 쓰임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댓글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