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욥 42:1-17
◎ 제목: 욥의 회복
1. 본문 개요
a. 욥 42:1-17 욥의 마지막 답변과 후기
3. 관찰
a. 1-6절 욥의 마지막 신앙고백
b. 7-9절 세 친구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
c. 10-17절 욥의 나중
2. 적용
이제 드디어 ‘욥기’가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천상회의로부터 시작하여 욥에게 닥친 끔찍한 재앙들, 그리고 친구들과 욥 사이의 긴 논쟁과 마침내 등장하신 하나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건과 말들의 향연이 계속해서 이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욥기의 마지막 장인 42장입니다. 42장은 총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먼저 1-6절은 욥의 마지막 신앙고백이 등장합니다. 7-9절은 ‘세 친구’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와 그들에게 알맞은 처분을 내리시는 장면입니다. 마지막 10-17절은 욥의 모든 상황이 회복되는 내용입니다.
38장부터 41장에 이르는 하나님의 ‘질문’에 대하여 욥의 답변을 생각해 본다면, 욥의 첫 번째 답변은 40:3-5이었고, 그의 두 번째 답변이자 하나님과 욥 사이의 대화의 종지부가 바로 오늘 본문 42:1-6절입니다. 앞선 40장에서 욥이 첫 번째로 하나님께 대답할 때에는 ‘하나님과 더는 논쟁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는데 그쳤다면,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다 듣고 난 욥의 답변은 그야말로 완전히 세계관이 뒤바뀐 ‘신앙고백’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42장에 나타나는 욥의 대답은 결코 자신의 교만이나 하나님께 반항하는 죄에 대한 회개의 결과물, 또는 어떤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 새로운 깨달음에 다다른 결과물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욥의 마지막 답변이 자신이 무언가 잘못한 것에 대해 회개하는 내용이라면, 오늘 본문 7-9절에 하나님께서 욥을 ‘세 친구’의 중보자로 사용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욥도 똑같이 죄를 저질러 회개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말이죠.
욥이 자신의 교만을 회개했거나 혹은 무지로부터 어떤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2-6절의 내용을 원어성경대로 직역해 보면 이렇게 됩니다. 먼저 2절입니다. “당신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며 당신의 뜻이라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분명한 욥의 고백입니다. 처음부터 욥은 이 부분에 있어서 바뀐 것이 없었습니다. 다음으로 3절입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당신의 뜻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한 사람이 대체 누구입니까? 그래서 저는 말했던 겁니다. 저는 모른다고 말이지요. 인간의 이해 능력을 벗어나는 당신의 놀라운 일들은 저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줄곧 말해왔습니다.” 우리 개역개정 성경의 번역은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욥’이었고, 그 부분에 대해 욥이 회개하는 것 같은 뉘앙스의 번역입니다. 하지만 원어상으로는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함부로 말하는 이들과 욥 자신은 다르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욥이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해 나는 다 알 수 없다는 반성적 지혜‘를 줄 곧 이야기 해 왔음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4절도 원어성경대로 직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제발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어달라고, 제가 여쭐 테니 제게 알려 달라고 그렇게 간절하게 원했습니다.” 맞지요. 욥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이 맞는지, 그리고 자신에게 닥친 고난이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나의 이성과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는 고통이라는 사실이 맞는지 하나님께 끊임없이 물었고,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세 친구, 그리고 엘리후와 논쟁을 해 왔던 겁니다. 그래서 결국 5절에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답을 들었음을 고백하는 겁니다. 5절의 원어성경 직역도 들어보십시오. “이제 제 귀로 당신의 음성을 듣고 제 눈으로 당신을 만나 뵙게 되는 군요.” 이제 너무나 선명하게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셔서 마음이 시원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6절에 “그 동안 이 진흙더미와 잿더미 위에서 멸시와 조롱을 당해왔습니다만 이제 당신으로 인해 위로를 얻습니다.” 라고 갈무리가 됩니다. 우리 개역개정 성경에 ‘회개하나이다’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나함’은 ‘위로’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는 겁니다. 결국 욥의 마지막 고백은 ‘잘못에 대한 회개’가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이 바르게 하나님을 붙들고 있었음을 하나님께서 확인시켜 주신 것에 대한 감사와 그런 가운데에도 혹 하나님께 온전하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에 대한 미안함이 뒤섞여 있는 그야말로 ‘신앙고백’인 셈이지요.
정리해 보면 이런 겁니다. 그는 도무지 인간의 이성과 이른바 ‘인과응보의 원리’로 대변되는 ‘규범적 지혜’의 차원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분명히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작용하는 영역의 차원에서 자신의 고난은 해석되어야 한다.’는 반성적 지혜를 가지고 계속 세 친구들과 논쟁해 왔지요. 하지만 그러한 욥도 결국 ‘인간중심적인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한 채 자신의 말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그를 만나 주심으로 ‘하나님의 안목’을 얻게 되었고, 혼돈이 존재하는 세상 가운데에서도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신비로운 질서가 형성되어 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붙잡고 있었지만 비로소 진정으로 하나님의 ‘반성적 지혜’의 깊은 차원을 이해하고 깨닫게 되었으며 그것이 자신에게 위로가 되었다는 말이지요.
결국 이런 겁니다. 욥이 분명 반항적이고 불경한 말들을 많이 한 것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서도 오직 하나님만 향했습니다. 반면에 친구들은 욥을 향하여만 말했습니다. 세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교리는 너무나 완벽한 정통 교리였지만, 친구 욥의 위로자가 되기는커녕 심판자가 되었습니다. 욥은 분명 자신에게 닥친 고난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해결책도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 하나님께 귀중한 신앙의 고백을 하는 겁니다. ‘그래요. 주님! 제가 정말 모른다고 하나님께 말씀드렸는데, 정말 내가 알 수 없는 것들이었네요. 그것을 확인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욥의 신앙의 고백에 손을 들어 주셨고, 그로 하여금 세 친구들의 ‘중보자’가 되게 하신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욥을 중보자로 회복시켜주셨고, 소유를 회복시키셨으며, 인간관계를 회복시키셨습니다. 10-17절을 보시면 욥은 처음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더 받았습니다. 재산은 두 배가 되었고, 자녀들은 원래의 숫자를 회복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복의 이유에 대해 전혀 기록되지 않았음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10절에 욥이 친구들을 위해 기도할 때에 욥의 곤경에서 돌이키셨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욥이 친구들을 위해 기도한 것에 대한 대가로 욥을 회복시키셨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욥에게 허락된 고난도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결단이었던 것처럼 그의 회복 또한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적 결단이었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욥기의 결말은 흔히 우리가 기대하는 결말과는 같지 않습니다. 그렇게 괴롭히던 친구들이 정확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그와 반대로 욥은 높아지는 결말을 우리는 은근히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세 친구들은 욥의 중보로 심판 받지 않았고, 결국 욥도 17절에 나타나는바 ‘늙어서 나이차서 죽었다.’는 것이 결말입니다. 시원하지도 명쾌하지도 않은 답이지요. 하지만 욥기는 늘 이유에 대한 설명과 정답을 요구하는 인간의 본성과 그것을 조장하는 세상의 흐름 가운데에 경종을 울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정답 자체이신 하나님을 붙들고 의지하는 신앙의 회복과 생각의 전환이 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도전합니다.
이 새벽에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했던 욥의 신앙을 본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똑 떨어지는 답을 찾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강요합니다. 그리고 답을 찾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이라고 정죄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고통과 고난이 끊이지 않는 인생이라 해도 정답은 오직 ‘하나님 그분 자체’이심을 매일 ‘하나님과 독대’함으로 깨닫는다면 그 인생은 성공한 인생입니다. 언제나 등불이 되셔서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매 순간 경험하며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