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빌 3:1-11


◎ 본문: 빌 3:1-11
◎ 제목: 가장 고상한 지식

1. 본문 개요
    a. 빌 3:1-6           헛된 자랑
    b. 빌 3:7-11           새로운 자랑

2. 본문 관찰
    a. 1-3절 육체를 자랑하는 자들을 삼가라
    b. 4-6절 과거 자랑에 대한 바울의 자전적 고백
    c. 7-8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해로 여김
    d. 9-11절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3. 적용
    오늘 우리가 읽은 3장의 첫 시작은 ‘끝으로’로 시작합니다. 끝으로는 결론을 유도하는 문구이지요. 그런데 사실 빌립보서는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런 구조를 떠져 보자면, 3장은 편지의 중반부입니다. 그런데 ‘끝으로’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것은 어색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여러 학자들의 견해가 있는데,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은 실재로 바울 사도가 3장에서 편지를 마무리 하려고 했는데, 그 즈음에 빌립보 교회로부터 ‘3장 내용의 이슈’인 이단의 문제가 빌립보 교회를 힘들게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서 좀 더 서신의 내용이 길어졌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이 견해가 힘을 받을 수 있는 것이 1절과 2절의 흐름이 맞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1절에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자신이 1,2장까지 써서 보내려고 했던 부분을 다시 반복해서 결론처럼 맺으면서 편지를 끝내려고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2절에 ‘개들을 삼가고…’라고 하면서 앞선 1,2장에 언급되지 않았던 ‘이단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는 겁니다. 1절과 2절이 서로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3장으로 결론을 맺으려다가 뒤 늦게 전해진 ‘이단의 소식’을 듣고 갑자기 편지의 내용이 길어지게 된 겁니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갑자기 편지의 내용을 늘여야 할 만큼 빌립보 교회의 이단의 문제는 긴급성과 심각성을 가진 이슈였습니다. 2절을 보시면 ‘개들’이라고 바울이 과격한 표현을 쓸 만큼 교회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에 대해 ‘두 가지 표현’이 등장합니다. 먼저 ‘행악하는 자’이고, 다른 하나는 ‘몸을 상해하는 일’이라고 우리 성경은 번역을 했는데, 사실은 ‘몸을 상해하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이 이단의 특징이 두 가지로 드러나는 겁니다.

    먼저 ‘행악하는 자’들은 문자적으로는 ‘악한 일을 해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런데 3절의 내용과 연결하여 보면 이 행악하는 자들은 다름 아닌 ‘육체를 신뢰하는 자’ 즉 유대인의 율법적 행위를 강조하고 자랑하는 자들을 뜻합니다. 바울은 그들이 ‘율법적 행위를 강조하고 자랑하는 것’을 악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셈입니다. 또한 ‘몸을 상해하는 자’는 ‘할례’와 연결할 수 있지요. 역시 3절에 ‘자랑’이나 ‘육체 신뢰’라는 표현이 이어져 나오는 것을 보면 몸을 상해하는 행위가 할례임을 연상케 합니다. 그래서 종합해 보면, 바울이 삼가라 했던 ‘개들, 행악하는 자, 몸을 상해하는 자’는 다름 아닌 할례를 신봉하던 유대주의자들로 보입니다. 이들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말하면서도 거기에 더하여 ‘율법준수’라는 덫으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옭아매려 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마주한 대적자들은 육체를 신뢰하고 자랑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통과 율법의 수혜자라는 선민의식, 자신들만의 구별된 전통이 복음을 대적할 커다란 자랑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삼가라’고 강력하게 명령합니다. 여기에서 ‘삼가라’고 번역된 ‘블레포’라는 단어는 원래 ‘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주의 깊게 본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복음에 대적하여 쏟아내는 저들의 가르침을 주의 깊게 보고 경계하라는 의미인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놓고 보면, 1절과 2절이 서로 연결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참 잘 연결이 됩니다. 결국 육체를 의지하면서 주안에 거하는 삶은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러하기에 ‘개들, 행악하는 자, 몸을 상하게 하는 자’인 대적자들을 삼가는 방법은 적극적으로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임을 또한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분명히 ‘육체를 자랑하는 유대인’ 그들도 분명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다고 말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문자적으로 준수하는 육체를 앞세워 자랑하는 겁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말씀의 참 뜻을 어기며 행악하고, 소중한 육체를 도리어 고행으로 학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주 안에 거하는 자들은 결코 ‘육체’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의지하고, 내 육체로 행한 일보다 예수를 자랑합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가 진정한 ’할례파‘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마음에 할례를 행한 자가 참 할례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바울의 가르침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유익합니다. 우리는 복음으로 충분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온전하려면 무언가 더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결코 우리의 구원은 내가 무언가를 더 하기 때문에 완전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하기에 성도는 교회 안에서 감당하는 직분이나 사역에 대해 결코 ‘그 직분이, 그 사역이 나의 구원을 더 완전하게 한다.’는 생각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나의 섬김의 자리는 오직 ‘구원 받은 감격’이 너무나 크고 감사하여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성령의 힘으로 봉사하는 ‘직분과 사역’이 진정한 은혜라는 겁니다. 2024년을 바라보면서 더욱 이 마음을 우리 안에 새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대적자들이 ‘육체를 신뢰하고 자랑하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자기 이야기를 합니다. 자신이야 말로 만약 육체를 신뢰함으로 구원을 완전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에 적임자라는 겁니다.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고, 그 율법의 문자적 준수에 목숨 걸면서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서 흠 없는 자라고 자부했던 자가 자신이었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바울은 바뀌었습니다. 7절에 무어라 합니까? 자신은 다 버렸답니다. 다 ‘해’로 여긴답니다. 8절에는 심지어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을 ‘배설물’, 똥으로 여긴답니다. 이 세상에 자신이 싼 똥을 끌어안으면서 자기 몸에 쳐 바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러면서 ‘보세요. 제 똥 너무 예쁘지요? 너무 향기롭지 않나요?’ 그러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 있으면 빨리 병원 보내야지요!

    자신의 직분을 의로 내세우고, 자신이 교회에서 섬기는 사역을 자랑하며, 사회적 지위와 명예로 콧대가 높아지고 어께가 올라가는 것은 적어도 내가 예수 믿는다면 결코 하지 않을 일이라는 겁니다.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삶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겁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나서야 율법의 자리를 정확하게 할 수 있고, 참된 의는 그 율법을 완벽하게 지킴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은총과 사랑을 통해서 얻는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렇게 선물로 받은 의가 우리를 부활의 몸으로 이끌 것을 믿었기 때문에, 육체를 신뢰하던 과거의 삶을 버리고 주께서 부르실 날을 고대하며 살았습니다. 바울의 유일한 자랑은 다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재발견 된 그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주님 앞에 서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 새벽에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신앙의 연수가 한해 두해 쌓여 가고, 교회에서의 생활들을 해 나가다 보면 어느 덧 ‘자기 의’로 가득한 나의 모습을 바라볼 때가 너무나 많음을 고백합니다. 이것은 먼저 목사인 저에게 있는 일입니다. 늘 설교하는 자리에 서다 보니 가끔은 ‘나는 설교 들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는 착각을 합니다. 나는 주님의 은혜가 없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는 겁니다.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 모릅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덧입지 않고는 생명의 길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매 순간 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을 붙들고 그 진리만이 나를 살리는 가장 고상한 지식임을 고백하며 승리의 삶을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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