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빌 3:12-21
◎ 제목: 그리스도를 본 받아
1. 본문 개요
a. 빌 3:12-16 사도 바울의 열심
b. 빌 3:17-21 나를 본받으라
2. 본문 관찰
a. 12-14절 부르심을 향한 바울의 다음질
b. 15-16절 부르심을 향한 성도들의 달음질
c. 17-19절 바울의 목회적 심정과 간곡한 부탁
d. 20-21절 부활의 소망 중에 그리스도를 기다림
3. 적용
바울 사도는 3장 전반부를 ‘행악하는 자, 몸을 상하게 하는 자’인 유대 열광주의자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신이 그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기는 ‘변화된 존재의 상태’가 되었음을 자신의 ‘신앙의 여정’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서술하였습니다. 3장의 후반부 역시 빌립보 성도들이 각자의 신앙의 여정 가운데에서 어떠한 태도로 임해야 하는지를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통해 소개합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 투옥 중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고난과 혹 당하게 될지도 모를 죽음에 대해 결코 억울한 현실이 아니며 도리어 그리스도를 본받고 있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지금 그를 끌고 가는 것은 ‘사망’처럼 보이지만, 실은 죽음 너머의 부활의 능력이 그를 당기고 있습니다. 죽음을 향해 달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죽음’은 그저 결승선일 뿐이지 그 너머에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 바울을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바울의 시선은 바로 그 결승선 너머에 머물러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신앙의 여정 전체 과정’을 소홀히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 ‘과정’에 임하는 태도를 ‘달음질’에 비유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태도가 바울 개인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앞선 3:8-10절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덧입은 모든 성도’라면 반드시 자신의 본을 따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결코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장차 얻을 영광을 위해 지금 맡겨진 ‘사도적 사명’을 온전히 완수하려 합니다. 이미 얻고 다 이루었다면 치열할 필요가 없겠지요. 하지만 사명은 죽을 때까지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사명을 완수함에 있어 자신의 열심으로 하지 않는답니다. 자신의 열심으로 완수하려 함이 아니라,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그리스도의 열심으로 감당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열심이라면 ‘그래 이만하면 됐다.’에 멈추겠지만, 예수님의 열심은 ‘아직 더 남았다.’로 이끈다는 겁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12절에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으로 묘사합니다. 바울이 열망하고 있는 것은 사실 자신이 설정한 목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의 달음질의 방향은 ‘다메섹’에서 바뀌었습니다. 다메섹에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가던 바울이 도리어 예수께 잡힌 바 된 되어 그의 달음질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이제 그의 인생은 예수가 끌고 가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께 잡힌 바 되었다’는 표현에는 ‘예수가 바울을 목적지까지 이끄신다’는 고백이 녹아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바울 사도는 13절에 머뭇거리거나 뒷걸음질 치지 말고 계속 전진하라고 말합니다. 뒤의 것은 잊어버리고 앞의 것을 잡으려 달려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12절과 13절을 놓고 보면 매우 대조적입니다. 분명 그리스도에게 잡힌 바 되어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것이 지금 바울 자신의 삶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일에 대단히 ‘능동적이어야 한다.’고 동시에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구원 받은 자의 아이러니’입니다. 결코 구원에 있어서 어떠한 것도 우리의 공로나 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끌고 가시는 여정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속에서 매우 기민하고 능동적으로 전심을 다하여 살아 내야 하는 삶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구원의 ‘종말론적 성격’ 때문입니다. 만약 구원이 예수 믿고 천국 어딘가로 이동하는 것이라면, 믿는 즉시 이 땅에서 우리가 구원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은 다 마친 것이 될 겁니다. 하지만 구원이란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고, 하늘의 시민답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 믿는 일은 시작이 있고, 현재가 있으며, 미래가 있는 여정이 됩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 받았으나, 아직 구원이 완성되지 않은 것이라는 말아지요. 그래서 바울은 결승점에 있는 경주자처럼 자신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바울이 17절에 ‘너희는 나를 본 받으라’고 자신 있게 명령을 합니다. 이 명령은 자신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먼저 그 만큼 가본 사람으로서 자신이 경험했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로의 초청입니다. 그리스도처럼 되는 겸손의 삶이 주는 풍요로의 초대인 셈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본 받는 것이 다름 아닌 그리스도를 본 받는 것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을 본받는 다른 사람들을 주목할 것을 당부합니다. 이 말을 헬라어 원어성경에서 직역을 해 보면 ‘너희가 우리를 모범으로 가진 것처럼 그렇게 따르는 다른 사람들을 주목하라’는 말인데, 여기에서 ‘주목하라’는 말은 서로 격려와 경계를 늦추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즉, 바울을 모범으로 보고 그를 본 받으려는 것처럼 다른 빌립보 성도들도 그렇게 본 받도록 격려하고, 서로 바울을 모범으로 삼고 있는지를 항상 확인하라는 겁니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두 가지를 당부하고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대적자’들 때문입니다. 자꾸만 바울과 신실한 동료들의 뒤를 따르지 않고 15절에 언급된 것처럼 ‘달리 생각’한 나머지 점점 곁길로 빠져서 결국 18절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원수가 되는 안타까운 사례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눈물을 흘리며 호소합니다. 진정 따를 모범은 바울 자신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에는 복음을 왜곡해 사적 유익만을 취하는 유대주의자들에게 일부 성도들이 유혹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제시하는 길은 19절의 말씀처럼 멸망의 길이고 그들은 자기 배를 위해 달려가며, 결승선에서는 부끄러움 외에는 받을 것이 없음을 바울이 강조합니다.
이처럼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마땅히 따라야 할 모범과 반드시 피해야 할 모범 두 가지를 제시하는 겁니다. 전자는 십자가를 따르는 자가 되지만, 후자는 십자가의 원수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새벽에 바울 사도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한 두 길이 있음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전자의 길을 따라 십자가를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달음질 끝에 영광의 주를 대면할 것이고, 부끄러움이 아닌 명예가 주어질 것을 신뢰하면서 말이지요. 그 영광의 주를 기다리며 오늘을 달리는 참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바울 사도는 20절에 갑자기 ‘시민권’을 언급합니다. 소속을 강조하는 개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은 땅에 속해 땅의 원리대로 ‘배’로 비유되는 육체만을 위해 살지만, 성도는 하늘나라에 소속된 시민으로 산다는 겁니다. 성도는 보이지 않지만 실제적인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 사는 하늘나라 시민입니다. 그런 ‘하늘나라 시민’에게 중요한 성품은 다름 아닌 ‘인내’입니다. 인내는 그저 참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오심을 소망하며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날이 되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광 받으심을 모범으로 제시하며 우리도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할 것을 소망하는 인내를 가지라 말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종말론적인 삶’입니다. 이미 구원 받았으나 그 구원은 주님 오실 때에 완성되기에 ‘아직’ 영화의 상태가 아님을 깨닫고 늘 ‘성화의 삶’을 인내로 살아내는 성도를 하나님은 기대하고 계십니다. 그 종말론적 삶에 자신을 깊이 헌신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