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시 95:1-11
◎ 제목: 순종으로 드리는 찬양
1. 본문 개요
a. 시 1:1-6 예배로의 부름
b. 시 1:7-11 예언자적 신탁
3. 관찰
a. 1-2절 감사함으로 여호와를 노래하자
b. 3-6절 위대하신 왕 여호와께 경배하자
c. 7절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현재적 메시지를 들을 것을 말합
d. 8-11절 지난날처럼 하지 말라
2. 적용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시편 95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1-6절은 예배로의 부름으로 감사하신 여호와를 노래하고, 위대하신 왕 여호와를 경배하자는 내용입니다. 다음으로 7-11절은 언약을 맺으시고 찬양받으시는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이나 제사장들을 통해 전달하시는 예언자적인 신탁, 즉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납니다. 즉, 예배의 부름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간 백성을 향해 하나님께서 말씀을 부어주시는 전형적인 ‘예배의 형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시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이 95편의 시를 통해 예배의 자리로 우리를 초청합니다. 시인이 이렇게 예배의 자리로 우리를 초대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이론적으로 알았던 하나님을 실제로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크신 하나님을 알고 있기는 했지만, 그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를 새로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난 시인은 우리로 하여금 ‘찬양’에 있어서의 두 가지 차원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그리고 이 것은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올려드릴 ‘찬양의 방법’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찬양함이 옳을까요?
첫 번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할 때 ‘묵상이 있는 찬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시인은 1절에 하나님을 향하여 ‘구원의 반석’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에서 ‘구원의 반석’이라는 의미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첫 번째 의미는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은 반석과 같이 변함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베푸시는 구원은 절대로 빼앗길 수 없고 변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3절에 ‘모든 신들보다 크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이길 자가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바꾸거나 훼손할 자도 어디에도 없음을 시인은 노래합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반석‘이시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구원의 기초‘가 되신다는 의미도 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래서 5절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만드셨음을 찬양합니다. 모든 것의 시작이 되신 하나님이시기에 그 분은 모든 것의 기초, 즉 ’반석‘이십니다. 그런데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원의 반석‘이 되십니다.
이처럼 시인은 ’하나님을 알아서 감사함‘으로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창조의 사역, 그분의 구원을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에 대한 지식은 우리의 찬양을 확고하게 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찬양하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묵상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묵상하고, 나의 삶을 목자같이 인도하시는 우리 하나님을 우리가 알아볼 때에 더 실감나는 찬양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하기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찬양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어야 함을 우리는 오늘 시편을 통하여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에, 말씀에 기록된 모든 일들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우리가 ’묵상‘하면 그 일이 지금 나의 삶에 마치 경험되는 듯 살아나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그 놀라운 일을 행하신 하나님은 죽은 신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씀을 묵상할 때에 그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의 일하심을 지금 이 순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우리의 찬양은 현실이 되고, 현재진행형으로 올려드리는 찬양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시인은 두 번째로 우리에게 ’순종 있는 찬양‘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오늘 시인이 함께 찬양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독려하는 가운데 주의 깊게 보아야 하는 표현이 있는데, 그것은 6절에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는 표현입니다. 시인은 이 표현을 통해 지성소 더 깊은 곳으로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께 엎드려 무릎을 꿇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인간 왕’을 알현할 때에는 ‘허리를 굽혀’서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만왕의 왕이신 여호와를 향해 나아갈 때에는 그것보다 더 자신을 낮추어 ‘복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어야 함을 나타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시인이 ‘무릎을 꿇고 경배하자’고 할 때에 ‘무릎을 꿇고’라는 표현이 히브리어 원어성경 상으로는 두 번 반복됩니다. 이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고 완전한 복종을 의미하고, 또한 자신의 상태를 잘 살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함부로 나아가도 좋은 분이 결코 아닙니다. 구약의 제사를 살펴보아도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지성소’는 일 년에도 한번, 대속죄일에 그것도 대제사장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얼마나 조심을 합니까?
하나님께 기꺼운 복종의 찬양을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합당하게 예배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시인은 7-11절의 내용을 통하여 경고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이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면, 너희 조상들과 같이 완악한 마음으로 나가지 말 것을 말이지요. 결국 40년 광야 생활 동안 끊임없이 불평하며 불순종한 결과, 그들은 한 사람도 하나님의 안식의 상징인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하기에 우리의 찬양은 마땅히 ‘순종이 있는 찬양’이 되어야 함을 믿고, 그대로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때에 진정으로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찬양은 현재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우리의 삶에 경험하고., 지금 인도하시는 하나님, 장차 반드시 약속을 지키실 하나님을 인정하고 높여드릴 때에 진정한 찬양과 경배의 삶이 우리에게 펼쳐집니다. 그 시작점은 다름 아닌 ‘순종’으로 말미암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찬송가, 찬양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 찬양을 언제나 ‘새노래’로 부를 수 있습니다. 그 노래가 ‘새노래’가 되는 것은 오늘 또 새롭게 만나고 하나님을 경험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신 일을 깊이 묵상 할 때에 우리는 오늘 이 시간 나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알지 못했던 차원을 설명하시고 깨우쳐 주실 때에, ‘아멘’으로 순종하는 것만이 내 삶을 ‘새노래’로 채우는 방법이 또한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깊이 묵상함으로 과거의 하나님을 현재화하고, 오늘 겸손히 주님의 뒤를 따를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찬양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연수가 오래 되었다고 해서 이제는 나에게 무언가 새로운 것이 있겠는가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잘못 바라보는 태도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날마다 새로운 분이십니다. 우리의 불순종으로 그 ‘현재에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고,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안식’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매 순간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고, 주님께 온전한 순종을 보여드림으로 새노래로 여호와를 찬양하는 모든 전대중앙교회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