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시 96:1-13
◎ 제목: 통치자 하나님
1. 본문 개요
a. 시 96:1-13 통치자 되시는 하나님을 새노래로 찬양하라
2. 관찰
a. 1-3절 여호와를 송축하며 기이한 행적을 노래하라
b. 4-6절 지극히 위대하신 여호와를 찬양
c. 7-9절 만국의 족속들아,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
d. 10-13절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는 여호와
2. 적용
시편 96편의 주제는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라.’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다스리시는 왕이시며,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이 시는 온 땅과 열방이 여호와 앞에서 숭고하고 거룩한 예배를 드릴 것을 요청합니다.
1-2절은 총 여섯 개의 명령형 동사가 연속으로 이어집니다. ‘노래하라- 노래하라- 노래하라- 송축하라- 전파하라- 선포하라’ 등 총 6개의 명령에서 ‘노래하라’가 세 번 반복됩니다. 특별히 시인은 ‘온 땅’을 호출하여 여호와께 노래하라고 요청합니다. ‘온 땅’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와 백성을 포함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시인이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새 노래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옛 노래로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행하심을 기리기에 역부족이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 생명을 유지하고 세상을 다스리며 당신의 뜻대로 이끌어가시는 그분의 권능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새 노래를 지어 찬양해야 함이 옳습니다. 하지만 ‘새 노래’는 새로 지어진 노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불러야 할 새 노래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할까요?
첫 번째로 ‘새 노래’에 담겨야 할 내용은 ‘그의 이름을 송축하고 그의 구원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절의 내용이지요. 여기에서 ‘송축하라’로 번역된 히브리 동사 ‘바라쿠’는 ‘축복하다’는 의미를 가진 ‘바라크’의 강조 명령형입니다. 그런데 이 동사는 ‘하나님’을 목적어로 할 때에 ‘찬양과격찬’의 뜻을 가집니다. 그리고 ‘전파하라’로 번역된 히브리동사 ‘밧세루’는 기쁜 소식을 가져 온다는 뜻으로 구약에서 여호와의 구원 행위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할 때 사용됩니다.
두 번째로 ‘새 노래’에 담겨야 할 내용은 ‘하나님의 영광과 기이한 행적을 모든 백성들과 만민 가운데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의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에서 ‘선포하라’로 번역된 ‘씨프루’라는 히브리 동사는 ‘자세하게 열거하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 행위와 더불어 하나님의 영광을 섬세하게 일일이 말하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구원하신 여호와의 이름과 구원을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일, 그리고 구원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모두가 알도록 선포하는 것’이 새 노래에 담겨야 하는 내용이라는 말이지요.
시인은 ‘새 노래’의 내용에 대해 1-3절을 통해 언급한 다음 4-6절의 말씀을 통해 이러한 새 노래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하나님만의 차별성을 언급하면서 찬양을 이어갑니다. 4절에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모든 신들보다 두려워할 것을 노래합니다. 5절을 보시면 모든 신들은 돌이나 나무로 조각된 ‘우상들’, 즉 무가치한 것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은 하늘을 지으신 분입니다. ‘하늘’에는 일월성신이 있습니다. 돌이나 나무 조각으로 ‘일월성신’의 형상을 만들지만, 그것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그 모든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조차 피조물로 만드신 창조주이시라는 겁니다. 그러하기에 그분의 ‘다름’은 탁월한 다름이고, 그분의 크심은 도무지 다른 신들은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사실을 시인이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모든 것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모든 생명과 새로움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흘러나옵니다. 그 하나님은 아무런 말도 반응도 할 수 없는 우상과는 격이 다른 분이시지요. 그래서 6절에 시인은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고,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다고 고백합니다. 존귀와 위엄은 ‘왕’에게 어울리는 표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진정한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런데 그 왕권은 능력과 아름다움이며, 그것은 다름 아닌 ‘성소’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성소는 하나님의 임재가 드러나는 거룩한 장소이지요. 성소는 ‘왕좌’가 됩니다.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한 왕권은 그저 ‘어마어마한 힘이나 에너지’가 아니라 참으로 인격적이고 존재적인 실체가 있는 그 무엇이라고 시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여호와의 찬란함에 대해 서술한 다음에 7절을 통해 하나님을 향하여 민국 족속들로부터 영광과 권능을 받으실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에 합한 영광을 그에게 돌려야 한다고 8절을 통해 언급합니다. 그 영광을 돌리는 방법은 ‘예물을 들고 궁정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께 드려야 할 것은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임을 9절을 통해 다시 한 번 시인은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10-13절의 단락을 통해 시인은 모든 나라 가운데에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 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리며 그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유일한 주권자이심으로 지금은 세상이 흔들리지 않게 굳게 서도록 지탱하고 유지하시지만, 결국에는 공평과 의와 진실로 심판하러 오실 날이 있음을 시인은 말합니다. 결국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악인을 심판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을 펼쳐보이실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시인은 고백합니다. 의인들은 다름 아닌 바로 그 하나님을 즐거이 찬양하도록 부름 받은 존재임을 밝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96편의 시편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삶에서 회복해야 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회복’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을 ‘작게’ 여길 때가 많습니다.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민과 어려움에 대해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우리 하나님은 친근한 하나님이시고,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 맞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틀리게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에 대한 표현과 이해가 하나님을 너무나 작게 만든다고 생각해보시지는 않으셨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나에게 가까이 계시는 ‘내제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더불어 우리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지으시고, 모든 만물 위에 계시며, 모든 것을 친히 다스리시는 감히 피조물인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하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위대하신 하나님, 통치자 하나님’을 다시 우리의 마음속에 회복할 때에 우리의 삶에서 ‘승리’를 회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코로나 19라는 위기를 지나오면서 교회가 너무나 많이 위축되었습니다. 물론 방역 절차를 무시하고 무모하게 하여 세상 가운데에 빈축을 산면도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크신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을 드러내는 유일한 창구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을 다른 어떤 공동체도 아닌 ‘주님의 교회’를 통해 나타나고 드러내십니다. 그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렇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 감히 인간의 상식과 이성으로는 규정할 수 없는 크신 하나님,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찬양하고 높여드리는 ‘새 노래’를 주님께 드릴 때에 하나님의 영광은 다시 우리 교회를 통해 드러나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 ‘아버지 하나님’임을 인식하고 그분을 높이고 찬양하는 삶을 회복하여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