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시 99:1-9


◎ 본문: 시 99:1-9
◎ 제목: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한 하나님

1. 본문 개요
    a. 시 99:1-5           정의와 공의로 우리에게 행하시는 능력 있는 왕, 여호와
    b. 시 99:6-9           위대하신 하나님에게 합당한 규모있고 합당한 예배와 찬양

2. 본문 관찰
    a. 1-3절           만민이 떨며 땅이 흔들리며 크고 두려운 이름을 가진 여호와를 찬양하라
    b. 4-5절           능력있는 왕께서 정의와 공의로 백성에게 행하시니 하나님를 높여 경배할지어다
    c. 6-7절           하나님께서 주신 증거와 율례를 지켜 하나님께 나아간 믿음의 선진들
    d. 8-9절           응답하신 대로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할지어다

3. 적용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시편 99편은 ‘정의를 사랑하시는 만왕의 왕은 찬양 받기에 합당하시기 때문에 그분께 마땅히 찬양을 올려드려야 함.’에 대해 노래하고 있습니다. 오늘 시편의 핵심구절은 4절입니다. 제가 4절을 한 번 더 읽어드립니다. ‘능력 있는 왕은 정의를 사랑하느니라 주께서 공의를 견고하게 세우시고 주께서 야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나이다’ 이 구절이 왜 핵심 구절이 되느냐면, 이 구절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한 이유’를 가장 잘 요약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권력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수많은 정의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권력과 정의’가 공존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점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이 두 가지가 공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의가 없는 권력’을 이른바 ‘독재’라고 부릅니다. 그런 권력을 가진 나라를 우리는 바로 이웃으로 두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북한입니다.

    북한이라는 세계에서 ‘법’은 오직 ‘김정은’이라는 존재를 위해 돌아갑니다. 그의 말은 법이 되고,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은 곧 ‘불의’가 됩니다. 이렇게 정의가 없는 권력은 ‘폭력’이 될 수밖에 없고 그 밑에 있는 백성들은 두려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권력에 대하여 ‘정의’를 외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습니다. 정의가 없어도 자신은 ‘정의 가운데 살아간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무조건 복종합니다. 하지만 그 복종은 결코 ‘자발적’인 것이 아닙니다. 죽고 싶지 않기 때문에 짜내는 복종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는 겁니다. 우리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십니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정의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공의를 견고하게 세우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세워진 정의와 공의는 누구에게 베풀어집니까? 예. 4절을 보니까 ‘야곱’에게 베풀어집니다. 야곱은 좁은 의미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하지만, 넓은 의미로 확장하면 ‘하나님의 백성’을 통칭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향하여 ‘정의와 공의’를 행하신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적인 관점으로는 오늘 4절에 ‘정의를 베푸시는 절대 권력’에 대해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라고 표현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가지고 계시는 그 ‘전능하심’을 제대로 보여주시면 모든 만민은 떨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힘’에 대해 북한의 김정은이 가지고 있는 권력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그분의 힘은 ‘땅을 흔들어 버리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 분은 ‘이름’만 해도 ‘크고 두려운 이름’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힘’은 다름 아닌 ‘그분의 거룩’에서 나온답니다.

    ‘거룩’은 구별입니다. 창조주로서 피조물과 구별됩니다. 모든 것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존재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으로 말미암은 모든 존재들은 결코 하나님의 존재하심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그 거룩하심은 능력이 되어 모든 만물이 질서를 따라 움직이도록 지금도 붙들고 계십니다. 그 ‘거룩의 힘’은 우리로 하여금 오금이 저리고 다리가 후들거리게 만드는 힘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세상의 권력’과 같이 ‘겁박과 공포’로 우리를 다스리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십니다. 그것이 다름 아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보여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묘미’입니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강력하지만, 절대로 우리를 위협하거나 윽박지르지 않으시는 거룩하시고 은혜가 넘치는 하나님을 우리는 어떻게 하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찬양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이며, 의무임을 기억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의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증거와 율례를 지킴’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6-9절의 내용은 광야를 지나서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까지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요약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6절을 보시면 ‘모세와 아론’은 광야의 시절을, ‘사무엘’은 사사기라는 암흑기를 거쳐 ‘왕정의 서광’이 비취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연상케 하지요.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름기둥’ 가운데어서 말씀하셨답니다. ‘구름기둥’은 여호와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친히 스스로를 보이셨고, 모세와 아론, 그리고 사무엘은 그들에게 주신 ‘증거와 율례를 지켰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은 찬양할 때, 하나님은 ‘규모 없이’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심을 다시 한 번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규모 있는 예배’를 받기 원하십니다.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9절에 ‘그 성산’ 즉 예배의 합당한 장소에서 합당한 예식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고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특정한 장소’를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우리를 만나주시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각자 한명 한명이 이미 ‘거룩하게 구별된 성령의 전’입니다.

    그러하기에 깨닫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인격만이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무리 지금 이 예배당이라는 공간에 사람을 갖다 놔도, 그 심령이 온전히 ‘그리스도의 보혈’로 충만히 젖어 있지 않으면 그 심령은 도무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영과 진리’로 합당히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없습니다.

    이 새벽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들의 상태를 점검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폭군’이 아니십니다. 그러하기에 ‘무지막지한 능력과 힘’을 가지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늘 우리를 ‘정의와 공의’로 대하십니다. 하지만 결코 이것은 아무에게나 베풀어지는 특권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증거와 율례’를 보여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향하여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말씀하신 그 말씀을 따라 우리의 삶을 참으로 거룩하게 단장하여 주님께 나아가야 함이 옳습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우리가 거룩케 될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힘’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는 자들을 ‘성령의 전’으로 삼으시고, 그 마음의 중심에 ‘성령 하나님’을 보내어 우리 각자의 삶을 다스리게 하십니다.

    성령 충만한 자만이 하나님을 합당하게 예배할 수 있습니다. 2024년은 더욱 성령 충만한 한해가 되어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한 주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우리 전대중앙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새벽에 온전히 주님을 예배하는 2024년의 내가 되기를 간절히 구하며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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