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신 4:15-31

◎ 본문: 신 4:15-31
◎ 제목: 모세의 간절한 호소

1. 본문 개요
    a. 신 4:15-22           형상 금지
    b. 신 4:23-31           모세의 예언적 선포

2. 본문 관찰
    a. 15절           호렙산에서의 하나님의 명령
    b. 16-19절           어떠한 모양으로도 형상을 만들지 말라
    c. 20-22절           여호와의 기업 된 이스라엘
    d. 23-28절           언약을 잊어버릴 때 당할 심판
    e. 29-31절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을 때 얻게 되는 구원

3. 적용
    4장으로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율법’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어제 함께 살펴보았던 4:1-14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율법’을 주셨는데, 그 율법을 ‘호렙 산’에서 모세의 손을 통해 주셨음을 말하였고, 오늘 본문 15-31절은 그 율법 중에 ‘형상을 만드는 것을 금지하는 것’에 초점을 두어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15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번도 자신의 형상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형상 만드는 것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기 형상을 보여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형상을 만들어 하나님을 숭배하는 일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16절에 형상을 만드는 순간 스스로 부패하게 될 것을 경고하시는 겁니다. 왜 형상을 만드는 일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막으시고 경고하시는 겁니까? 인간이 만들려는 모든 형상이 다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16-19절까지 형상을 만들 수 있는 예를 일일이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들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하나님 대신에 ‘피조물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 그것으로 형상을 만들어 ‘하나님으로’ 섬긴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피조물’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행위가 됩니다. 하나님은 결코 ‘피조물’ 안에 갇혀 있을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형상을 만들어서 피조물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가두려는 행위가 바로 ‘형상을 만드는 일’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철저히 막고자 하시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결코 ‘피조물의 형상’에 갇힐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상’으로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창조자이니까요! 피조물은 이 세상 가운데 어떠한 모양으로 든 존재해야 만 그 존재 이유가 설명이 되는 겁니다. 인간에게 ‘형상’, 곧 지금의 육체가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나의 육체를 가지지 못하면 우리는 ‘존재 이유’가 없는 겁니다. ‘생명’의 징후가 없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스스로의 존재 이유, 생명이 있음’을 형상으로 증명하실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형상이 없이도 스스로 존재하시는,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드러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결코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이 세상 어떤 피조물로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시는 이유는 만들어진 형상은 결코 그 속에 생명이 깃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 말씀하시는 인격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형상은 결코 있을 수 없으며, 만약 하나님이 어떤 것으로 형상화되는 순간 그것은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우상’으로 전락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생명 되심’은 형상이 없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런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대체해 버리면 생명의 하나님을 생명 없는 그 무엇으로 대체하는 꼴이 됩니다. 세상에 ‘우상’이 존재하는 종교를 가만히 보십시오. 그 속에는 결코 ‘경배, 찬양’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우상이라는 것 앞에 뭔가 많이 갖다 바치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 위로를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차피 우상은 생명이 없으니 그 우상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해 주기를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내가 갖다 바치는 ‘뇌물’이나 먹고 그냥 내가 하는대로 내버려 두라는 겁니다.

    이렇게 우상으로 전락한 무언가를 섬기는 일이 반복되면 결국 그 우상을 섬기는 자들도 ‘생명이 없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도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일’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대 놓고 뭔가를 만들어서 그것을 섬기는 일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것이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우상’으로 삼을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돈’이 하나님의 자리에 있으면 우리는 ‘돈’으로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겁니다. ‘자녀’가 하나님의 자리에 있으면 그 사람은 ‘자녀’를 하나님으로 형상화하는 겁니다.

    핵심은 ‘결정의 주도권’을 무엇에 주고 있느냐입니다. 돈이 내 결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면 우리는 ‘돈’을 섬기는 겁니다. ‘자녀’가 내가 내리는 결정들에 있어서 중요한 기준이 된다면, 나는 ‘자녀’를 하나님처럼 대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결국 ‘생명 없는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그 무엇도 우리에게 ‘참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꾸만 다른 무엇이 자신의 생명을 좌우하는 듯 ‘결정의 칼자루’를 그것에 쥐어준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모세는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20-22절에 자신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언급합니다. 자신이 들어갈 수 없는 이유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 때문이라고 하면서, 자신이 그토록 들어가고 싶은 그 아름다운 땅에 들어가서 절대로 이 언약을 잊지 말라고 당부를 하는 겁니다. 24절에 하니님은 소멸하는 불이시고,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잊어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면, 모세 자신에게 심판이 임했던 것처럼, 결국 너희도 속히 망하게 될 것임을 잊지 말라고 요청합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게 되는 ‘므리바 물 사건’을 한번 잘 떠올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말’로 바위에 명하여 물을 내라고 했는데, 모세는 ‘지팡이로 바위를 쳐서’ 물을 냈습니다. 물은 나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었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다는 이유로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갑니다. 모세 스스로 결정하여 지팡이로 바위를 친 그 행위는 ‘자기중심성’에 의한 행동이었습니다. 그것이 ‘우상숭배’와 같다는 겁니다. 너희가 가나안에 들어가서 만나게 되는 ‘우상 숭배의 문화’, 즉 ‘자기중심적인 문화’를 절대로 따르지 말고 보이지 않지만, 백성을 인도하시고 모든 것을 선하게 결정하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삶을 살라고 경고합니다. 그 길만이 사는 길이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예외가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땅인 동시에 우상이 창궐하는 위태로운 땅이었던 것처럼,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이 세상도 그런 ‘이중적인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한 세상 가운데에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림 받은 사람들입니다. 너무나 ‘우상 숭배’에 빠질 여지가 많습니다. ‘과학만능주의’가 하나님을 대신하려 하고, ‘진리의 상대성’이라는 ‘합리적 사고’의 유혹이 ‘하나님은 없다.’고 주장하게 끔 만들려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하지만 이것들에게 유혹당하여 그 길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 앞에 놓인 것은 ‘심판과 멸망’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더욱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늘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면서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언약을 기억하시고 우리를 날마다 새롭게 하실 것을 기대하며 오직 하나님만 높여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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