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신 10:1-22

◎ 본문: 신 10:1-22
◎ 제목: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

1. 본문 개요
    a. 신 10:1-11           십계명을 받는 모세
    b. 신 10:12-22           여호와께서 구하시는 것

2. 본문 관찰
    a. 1-5절: 돌판과 궤를 제작하다
    b. 6-11절: 레위 지파의 직무
    c. 12-16절: 여호와를 사랑하라
    d. 17-22절: 이웃을 사랑하라

3. 적용
    신명기는 회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코 과거에 머물러 있는 책은 아닙니다. 과거사에 대한 뼈아픈 지적을 끝내고 장차 가나안에서 이루게 될 삶을 미리 내다보는 책이 바로 신명기입니다. 언약의 돌판을 주시는 그 순간마저 반역을 일삼던 백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다시 언약 관계와 약속의 땅을 향한 여정을 이어가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감당할 수 없는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하여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셨습니다. 그 경이로운 은혜로 지금 저와 여러분 또한 이끌어가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1절에 ‘그 때에’는 처음 두 돌판에 십계명을 받아 내려왔을 때에 금송아지를 만든 장면을 본 모세가 두 돌판을 던져 깨뜨리고 사십 일을 금식하고 중보 기도하여 여호와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금 송아지’를 빻아서 탄 물을 백성들에게 다 마시게 한 후를 말합니다. 그렇게 모든 우상 숭배의 잔재들을 완전히 청산한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늘 ‘반역한 자’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요동치는 그 한복판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 ‘탄원하는 중재자’로 섰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대신 듣고 그것을 ‘전달하는 중재자’로서의 역할 도 충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

    저는 전대중앙교회의 담임목사로서 이 모세와 같은 역할을 충실하게 해 내기를 마음속으로 늘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목사’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게 하시는 것은 결국 모세를 통해 말씀하셨던 그 역할을 저에게 부여해 주신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전대중앙교회 성도들의 울타리가 되고, 하나님과 성도님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 성도님들께서 저를 위해 많이 기도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비단 오늘 말씀에 나타난 ‘모세’의 중재자로서의 역할은 목사인 저에게만 부여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님들 각자의 삶에서 분명히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자리를 허락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믿는 자 각 개인에게 부어주시는 ‘사명의 자리’입니다. 그 사명의 자리에서 우리 모두가 감당해야 할 ‘중재자’의 역할을 늘 충실히 감당해 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다시 부르시고 처음과 같이 두 돌판을 다시 다듬어 산으로 올라오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는 그 쓴판을 ‘조각목으로 만든 궤’에 넣으라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그 궤가 지금 ‘모압 평지’에 머물러 있는 이스라엘 공동체 가운데 여전히 있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1-5절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 두 돌판을 다시 주시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는데, 그 내용이 12-13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을 요약해 보면, 다름 아닌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것’으로 정리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사랑’, 이 둘은 신앙의 근본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만 우리의 인생에서 순종이 뒤따르게 됨을 잘 압니다. ‘경외’는 ‘존재의 구별’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은 나와 정말 질적으로 다른 분이시구나!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나는 피조물이구나.’라는 분명한 인식에서 ‘경외’는 나옵니다. 그리고 그 분과 나의 질적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곳 ‘순종하는 삶의 시작’이라는 겁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소유할 때에만 그분을 섬길 수 있습니다. ‘경외’는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두려워하는 마음’ 만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의 ‘극치’가 바로 ‘예배’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새벽에도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예배에서 ‘사랑’이 빠져버린다면 그것은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섬김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비루하게 만들지 않을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사랑’을 회복하는 것임을 기억하고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들어가게 되는 가나안 땅에서도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삶을 살아가라고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16절에 나타나는 ‘마음의 할례’입니다. ‘할례’는 아브라함과의 언약 관계에서 ‘하나님의 백성’ 됨의 표로 행할 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명하신 규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몸의 할례’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고, 그것을 자랑이라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몸의 할례’ 말고 ‘마음의 할례’를 명령하십니다.

    ‘마음의 할례’는 마음의 새로움을 말합니다. 그 새로움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순종입니다. 마음의 할례가 없으면 이 백성은 ‘목을 곧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몸의 할례만 강조되면, 그 할례는 ‘자기 의’가 되어 버립니다. 내가 할례 받은 민족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되면, 결국 자기 민족이 아닌 타 민족에 대하여 배타성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결국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로서 ‘율법에 녹아 있는 사랑의 정신’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17-18절에는 마음의 할례를 받은 이가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언급합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뇌물을 받지 않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고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수여’하신 것은 그 율법을 통해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란느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건너는 가운데,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미 삼으셨고, 그 후에 시내 산에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하기에 율법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할 사랑의 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는 법’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러한 ‘율법의 사랑의 정신’을 온전하게 구현해 낼 방법은 오직 하나라는 겁니다. 마음의 할례입니다. 마음이 낮아지고 정말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내가 예수를 믿을 수 있다는 간절한 고백이 아니면 우리는 ‘교만의 외피’를 벗기지 않은 목이 곧은 백성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만 하나님께서 ‘죄 뿐인 인생’을 아들의 보혈을 보시고 용납해 주신 그 사랑의 방식으로, 또 다른 이들을 상대할 수 있습니다. 더 연약한 자를 돌아보는 ‘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새벽에 다시 한 번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에 나 자신을 헌신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모세처럼 비난보다 중재의 자리에 서고, 참으로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사랑을 회복하여, 마음의 할례로 겸손하게 행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모세처럼, 저와 여러분에겐 목숨을 주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늘 신령과 진정으로 주님을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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