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신 11:18-32
◎ 제목: 순종이 주는 선물
1. 본문 개요
a. 신 11:18-25 율법 순종과 땅 약속
b. 신 11:26-32 축복과 저주 그리고 율법 순종 요구
2. 관찰
a. 18-21절: 율법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b. 22-25절: 순종할 때에 땅을 약속하시는 하나님
c. 26-30절: 우리 앞에 놓인 축복과 저주
d. 31-32절: 우리 앞에 놓인 축복을 얻으려면 율법 순종하기를 요구하시는 하나님
3. 적용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할 때에 ‘가나안’은 무주공산이 아니었습니다. 그 곳에는 이미 일곱 족속이 터를 잡고 수많은 사람들이 거주하는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나름대로의 탄탄한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땅에서 경작할 수 있는 농업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농경기술의 밑바탕에는 ‘풍요의 신 바알’을 숭배하는 종교가 깔려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을 정복하는 일은 그리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습니다. 맨 처음 ‘가데스 바네아’에서 10명의 정탐꾼이 가나안 땅에 대하여 내렸던 ‘거민을 삼키는 땅’이라는 평가는 그저 잘못된 평가 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땅을 정복할라 치면 반드시 자신들의 목숨을 담보해야 할 만큼 그 곳 사람들은 장대한 사람들이었고, 그 문화적 기반은 탄탄해 보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곳으로 가는 것에 대해 찬성할 수 없었을 겁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으로 들어갔을 때에 철저하게 모든 우상을 파괴하고, 그 지역의 모든 문화적, 종교적 요소들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반드시 올무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일에 있어서 중요한 핵심은 결코 환경이나 군사력에 있지 않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어차피 이스라엘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 싸움을 당신 자신이 싸우시겠다고 공언하셨습니다. 그러하기에 가나안 정복은, 그리고 그 땅을 정복하여 그 가운데에 잘 살아내는 일은 ‘순종을 통한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에 놓여 있음을 그들은 깨달아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하나님께서는 앞선 11:1-17절의 내용을 눈에 잘 띄는 ‘손목, 미간, 문설주, 바깥 문’에 기록하라고 하십니다. 이어지는 19절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집에서든 길에서든, 누웠든지 일어날 때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20절에는 심지어 문설주와 바깥 문에도 기록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라고 하신 이유는 말씀을 항상 볼 수 있는 곳에 두어 늘 기억하고 최우선 순위로 삼으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어제 11:1-17 말씀을 살폈을 때, 그 내용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과거의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오직 하늘의 하나님만을 바라며 살아가야 만 그 땅을 얻고, 그 땅에서 나는 소산을 누리며 복을 얻는다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 11:1-17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반복하여 기억하는 것만이 결국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를 낳고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여 순종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너희 당대에만 이루어지고 끝날 일이 아니라 너희의 자손들에게도 이 사실을 가르쳐서 ‘기억의 유산’을 남기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것만이 이스라엘의 현재와 미래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거죠.
그러면서 21-25절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너희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두고 기억하는 일을 감당하며, 그 말씀을 자손들에게 강론하기를 멈추지 않을 때에 조상들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을 얻고, 그 땅에서 이스라엘이 자자손손 끊어지지 않는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나안 땅은 안전한 땅이 결코 아닙니다. 그 곳에 버티고 있는 족속들은 강하게 이미 터전을 잡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아무리 국력을 키운다고 해서 그들의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이스라엘의 안전이 가나안 땅에서 지켜진다고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십니까? 23절에 여호와께서 모든 나라 백성들을 이스라엘로부터 쫓아내시고 이스라엘이 그들보다 강대한 나라를 차지하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이스라엘의 안녕을 담보한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나를 두려워하고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세상이 이스라엘을 당해내지 못하게 하실 것이라는 말이지요. 만약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두려워하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요? 너무나도 당연히 불안과 불만의 노예가 되어서 가나안의 족속들과 똑같은 존재가 되어서, 하나님으로 인하여 멸망 당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하려고 마음을 낮출 때 더는 불안과 불만의 노예가 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보면, 하나님께서는 결국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선택권’을 주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 26절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 앞에 복과 저주가 있다는 말이지요. 간단합니다. 말씀을 들으면 복이 임하지만 돌이켜 떠나면 저주가 임할 것이라는 겁니다. 27-28절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되고, 하나님의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고 가나안의 우상을 따르면 저주를 받게 된다는 말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신명기의 말씀을 통해 거듭하여 우리에게 설명되지만, 신앙은 선택이라는 겁니다. 늘 순종은 어렵고 불순종은 쉽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 힘들고 어렵지만 ‘순종’을 선택하려고 몸부림치는 여정이 바로 ‘신앙의 여정’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예배의 자리는 결단의 자리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그저 의무적으로 행해지는 의식이나 마음의 불안을 지우기 위한 감정 치료의 자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나의 매일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선택으로 불순종하는 지난 삶의 자리를 끊어내고, 순종으로 나의 남은 날을 채우겠다는 결단이 우리의 예배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예배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의지적 결단으로 자신의 삶을 기꺼이 드리는 헌신입니다.
이 아침에 이스라엘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이 신명기 말씀이 동일하게 저와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결국 불순종에 대한 징계의 경고를 받았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언약을 배반하여 징벌을 받고 말았습니다. 말씀을 우습게 여기는 선택은 결국 그들을 저주의 자리로 인도했다는 겁니다. 말씀을 경홀히 여기는 죄에 대한 경고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복의 손길’만큼이나 ‘책망의 손길’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영적 민감함이 우리에게 요구됩니다. 우리가 전혀 죄와 상관없는 삶을 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내가 죄를 짓는 순간 그것에 대하여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깨닫고 즉시 회개하여 돌이키는 영적 민감함이 요구됩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단 마음으로 받을 수 있는 영적 더듬이를 가다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