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신12:1-19
◎개요
1절 서문. 이것이 규례와 법도다
2-7절 한 하나님과 한 장소
8-12절 정착 이전과 정착 이후
13-19절 금지와 허락
◎본문연구
율법에 순종하라고 수차례 강조한 이후에 모세는 12장에 들어서며 비로소 율법의 내용에 대해서 강론합니다. 십계명의 구조를 따르듯, 가장 처음 나오는 것은 다름 아닌 제1계명,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여기에 대한 풀이인 것이죠. 제1계명이 우상숭배를 금지하듯, 모세는 이방 성소를 제거하고 오직 여호와만 섬기라고 명령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여호와만 믿고 섬겨야 합니다. 그 신앙은 그 땅에 설치된 우상 제단을 헐고, 우상의 형상들을 부수고 불사르는 것으로 우선 표현되어야 합니다. 선별적인 제거가 아닙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우상들입니다. 이것들을 헐고, 깨뜨리고, 불사르고, 찍고, 멸할 정도로 철저하고 예외없는 제거여야만 합니다. 타협은 없는 것이죠.
참과 거짓, 실재와 허위, 신비와 신화 등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는 걸쳐 있을 곳이 없습니다. 양다리, 양쪽 다는 안되는 것이죠. 하나님은 단 한 순간이라도 다른 무엇과 비교의 대상이 되실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사랑과 신뢰를 나누어 주어도 될 만한 대상이 남아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비교적 나은 신앙이 아니라 오직 한 분만 마음과 뜻과 힘과 생명을 다해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이것이 신앙입니다.
삶의 많은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선택들을 하게 됩니다. 작은 것에서 큰 것까지, 별 것 아닌 것에서 정말 중요한 것까지, 온갖 선택들을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 순간 우리는 우리의 유익을 쫓아 선택할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불이익을 감수하려 하지 않습니다. 당연합니다. 유익이 낫지, 불이익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초등학생 때, 주일만 되면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주일학교 예배는 당연히 가야 했죠. 왜냐하면 모태신앙이기 때문에, 가지 않으면 그날은 매 맞는 날이고, 집에 들어가는 것조차 힘든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일학교 예배를 한 두 번 빼고 다 갔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가느냐 안가느냐를 선택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5분을 늦게 가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하필 주일 아침에 재밌는 만화들이 방영을 했거든요. 그래서 시간을 맞춰서 예배를 가느냐 아니면 그 만화를 5분만 더 보고 지각을 하느냐 이 선택을 항상 했었습니다. 그 당시, 저에게는 큰 시련이었죠. 왜 하필 주일 아침 예배 시간에 맞춰서 재밌는 만화들이 방영을 하는지 늘 시험거리였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버릇이 들고 습관이 되어서, 몸이 예배에 맞춰져서, 지금은 괜찮으시겠지만, 젊었을 때의 기억을 한번 되짚어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지금 생각해보니까, 우리 부모님이 지금 제 나이 때, 제가 주일학교 시절 때, 아마 우리 부모님도 주일 아침에 한 번쯤 교회를 가기 싫어했던 적이 분명 있었을 거라는 거죠. 왜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이런 광고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아~ 학교 가기 싫다 나 학교 가지 말까? 이러니까 옆에서 어머니가 그래도 가야지 너가 교산데. 이 광고를 패러디해서 아~ 교회 가기 싫다 교회 가지 말까? 옆에서 어머니가 그래도 가야지 너가 목산데. 라고 하는 광고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수많은 순간마다 온갖 선택의 길에서 늘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물론, 좋은 습관들은 버릇이 되어서 선택을 할 필요도 없이 행동하면, 몸이 먼저 반응하면 좋습니다. 마치 오늘 새벽에 이 자리에 나오시기 위해서 시간이 되니 눈이 번쩍 뜨여진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습관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버릇들은 습관이 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죠. 그러면 다른 것들과 비교도 하지 않게 될 것이고, 고민하며 선택을 하는 일도 아주 드물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되기가 쉽지가 않죠. 예배의 자리에 나가려고 새벽에 일어나기가 처음에는 얼마나 어려운지요. 물론 저는 지금도 쉽지는 않습니다만, 청년 때,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시간되면 눈을 번쩍 뜨기까지가 3개월 이상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한 일주일만 새벽예배를 안가면, 몸은 금새 거기에 적응을 해서, 새벽예배 가는 것이 또 힘들게 되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나쁜 습관과 나쁜 선택은 하기 쉽고, 버릇을 들이기도 쉽습니다. 하지만 좋은 습관과 좋은 선택은 버릇을 들이기도 어렵고 선택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무언가 손해보는 기분이고, 항상 무언가를 희생해야 하는 것이죠. 우리는 삶의 매 순간마다 무엇을 선택하십니까?
하나님을 위한 선택이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하시는 선택이십니까?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모든 선택의 길에서 습관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택을 하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12장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표현이 있습니다. 5절과 11절, 14절 말씀이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곳으로 라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12장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것과 함께 여호와가 선택하실 한 장소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각기 자기 소견대로 했던 시기도 있지만, 신명기는 그것을 거부하고 한 장소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제사는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가나안의 방식과 전혀 다르게, 하나님의 성품과 영광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그분이 정하신 곳에서만 예배해야 합니다. 설령 그곳이 사람 보기에는 덜 화려하고 덜 웅장하고 더 소박할지라도, 주님의 이름을 두신 곳에서만 예배해야 하는 것이죠.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나의 열정과 정성이 아니라 순종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마치 내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지 않으신다고 착각을 합니다. 또, 내가 예배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서 하나님을 더 영화롭게 한다고 착각합니다. 마치 내가 아니면 우리 교회는 안 돌아간다고 착각도 하죠. 그러나 그것은 정말 착각일 뿐이고, 교만이죠. 하나님 앞에서 건방지고 교만한 모습이죠.
모세가 아니어도 애굽 바로의 무릎을 꿇리고, 홍해를 가르시고, 가나안 족속들을 심판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일을 행하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다윗이 아니었어도 충분히 이스라엘을 강대국으로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들을 사용하시길 원하셨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이고, 우리에게 헌신도 요구하시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고, 우리에게 능력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시켜주심에 순종하고, 봉사하고 헌신할 수 있는 힘을 주심에 감사할 것 밖에는 없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삶의 매순간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한번 더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교만하지 않으며, 겸손함으로 주님께 예배드리며 헌신하고 봉사할 수 있음에 늘 감사하는 오늘 하루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