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신 14:1-21
◎ 제목: 걸맞게, 구별되게
1. 본문 개요
a. 신 14:1-2 금지된 애도법
b. 신 14:3-20 정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
c. 신 14:21 음식 규례
2. 본문 관찰
a. 1-2절: 가나안의 애도법을 따르지 말라
b. 3절: 머리말
c. 4-8절: 땅에 있는 정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의 구분
d. 9-10절: 물에 있는 정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의 구분
e. 11-20절: 공중에 있는 정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의 구분
f. 21절: 음식에 관한 규례
3. 적용
우리의 손에 쥐어져 있는 성경은 ‘보편적 진리’입니다. 우리는 이 보편적 진리를 21세기 대한민국이라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장에서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지금 이 시대에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면서 앞으로 가나안이라는 땅으로 가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실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대이고, 거룩하게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에게 부합하는 생활 규정에 담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에는 ‘금지된 애도법’에 대한 하나님의 지침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금지 조항’을 이야기하시면서 강조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이스라엘 백성 너희 들은 하나님의 성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성민’이라는 사실을 생각해서 삼갈 것을 삼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금지되고 있는 애도법의 내용은 어떤 것입니까?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상하게 하고,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미는 것입니다.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이야 하나님의 성민이든 아니든 권장할만한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마 위 털을 미는 행위’와 ‘하나님의 성민’임을 기억하는 것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아할 수 있습니다. 이마 위 털을 미는 행위는 레 21:5절에 나타난 앞부분 머리카락을 제거하여 대머리로 만드는 것을 금하라는 뜻입니다.
여러 구약 학자들이 몸을 베어 상하게 하는 것, 앞부분 머리를 밀어서 대머리로 만드는 것 이 두 가지는 가나안의 장례 풍습일 것으로 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너희는 하나님의 성민’이기 때문에 이 두 가지를 하지 말라고 하실 때에는 이 행위가 무언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에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가나안 족속’과는 구별된 ‘성민’이기 때문에 하지 말라는 의미인 겁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이유는 덮어 두고 너희는 하나님의 성민이니까 이것 하지 말라.’이런 의미가 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와 방식은 ‘정체성’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민’이 되었기 때문에, 그 정체성에 걸맞는 ‘삶의 방식’을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두 가지의 관계 즉 ‘정체성과 존재 방식’이 반드시 합리적인 이유나 논리가 뒷받침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유일한 근거는 딱 하나입니다. ‘소속이 하나님의 성민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는 존재 방식과 삶의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유일한 우리의 존재 방식의 근거가 됩니다.
왜 이 부분이 중요하냐면, 뒤에 3-20절에 계속해서 이어지는 ‘부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에 대한 나열에 있어서도 어떤 ‘합리적이고 합당한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4-6절에 ‘먹을 수 있는 짐승’이 나열됩니다. 소, 양, 염소, 사슴, 노루, 불그스름한 사슴, 산 염소, 볼기가 흰 노루, 뿔이 긴 사슴과 산양‘들입니다. 이들을 먹을 수 있는 ’근거‘는 ’굽이 갈라져 쪽발도 되고 새김질도 하는 짐승‘이라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 ‘근거’라는 것이 합리적인가라는 것은 따져 봐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 ‘먹을 수 있는 짐승과 먹지 못할 짐승’은 영양의 측면이라든지, 세균 감염에 취약한 동물이라든지 그런 것들을 따져서 고려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먹을 수 있는 짐승과 그렇지 못한 짐승의 기준’은 우리의 측면에서는 설득력이 없다는 겁니다.
1차적으로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면서 새김질 하는 짐승’이 이른바 ‘정한 짐승입니다. 그런데 7절에는 새김질을 하거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먹지 못할 것이 있다는 겁니다. 기준이 똑 떨어지게 명료하지 않다는 겁니다. 합리적이지 않아 보이고,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겁니다. 돼지는 굽을 갈라졌는데 새김질을 못하니 먹으면 안 됩니다. 물에 있는 것들 중에는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은 먹을 수 있는데 그것이 없으면 못 먹습니다. 새에 관해서는 정함과 부정함의 기준이 아예 없습니다. 정한 새는 언급이 안 되고 먹으면 안 되는 날짐승만 죽 나열을 해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21절에 다시 등장하는 문구가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음식과 관련된 규례’를 지켜야 하고, 이에 더하여 스스로 죽은 것은 먹지 말되 이방인이나 객에게 파는 것을 상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라.’는 것으로 오늘 본문이 마무리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전체를 정리해 보면 이런 겁니다. 너희는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기 때문에 ‘구별된 삶, 새로운 존재 양식’을 따라 살아야 할 의무가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그런데 그 삶의 방식에 있어서의 ‘합리적인 기준’이라는 것이 명료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 근거는 딱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은 하고 이것은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너희는 이 ‘삶의 양식’을 고수하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신학적 용어로 ‘신정론’이라고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너희가 할 것과 하지 말 것을 정하셨다. 그 근거는 오직 하나 하나님의 판단이다. 그러니 너희는 그 기준에 대해 토달지 말고 그대로 행하라.’ 이것입니다. 판단과 결정의 주권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따라 지키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자신의 삶에서 거룩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홍해를 건너 ‘자유인’이 된 이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 그 법을 지키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구별된 백성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정을 따라 살 이유가 없는 겁니다. 하지만 그분의 성민으로 ‘구별 된 이상’ 그분이 정하신 규정을 따라 살 때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된다는 겁니다. 그 판단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단지 허울뿐인 이름이 아니라 거룩한 삶을 통해 증명되어야 하는 사명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하기에 거룩은 단지 ‘속된 것과 구별되는 종교적 처신’이 아니라 믿는 자들의 삶의 방식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정한 음식을 먹고 안 먹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 기준을 하나님이 정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인 나는 그것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정체성’을 유지한다는 믿음으로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모든 결정의 주권 되신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우리의 삶에서 선택과 결정을 행할 때에 결국 우리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 살아가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늘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 드리며, 그분이 허락하시는 것을 기쁘고 감사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