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신 16:18-22

◎ 본문: 신 16:18-22
◎ 제목: 공의의 하나님 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선진국’에 대한 기준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 가지 기준이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선진국으로서의 기준은 ‘스스로 보호할 수 없는 약자들을 위한 법적 질서가 보장되어 있는지의 여부’가 아닐까 합니다. 자연의 세계는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원리가 적용됩니다. 하지만 인간 사회, 특별히 ‘민주주의 체제’ 에서는 그 원리를 거스르는 ‘공의와 정의’로 판결하는 기준이 세워져서 약자라 할지라고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조건이 만족되는 나라가 선진국일 겁니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어떨까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켜서 ‘하나님 나라’의 모델하우스를 제시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어떻게 작동하고, 그 질서를 따라 나아갈 때에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얼마나 평강을 누리는 지를 보여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어떠한 질서를 따라 세워져 가기를 기대하고 계실까요?

    오늘 본문 18절에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으로 입성하여 각 성을 점령하게 되었을 때에, 각 성에서 ‘네 지파’마다 ‘재판장과 지도자’를 둘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재판장’은 히브리어로 ‘쇼페트’로 ‘사사’로도 일컫습니다. 사사기에서 이들 쇼페트는 정치적, 군사적 활동을 동시에 수행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재판장’은 지금 이 시대에 판결을 내리는 재판장들과는 다른 역할을 합니다.

    지금 이 시대의 ‘재판장’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정확한 판단력’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재판관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판단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원칙과 목표에 잘 순종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즉, 재판관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틀린 것인지를 확인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을 오늘 성경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세워질 재판관들에게 ‘공의로 백성을 재판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할 때에, 그 의미는 결국 ‘맞고 틀린 것에 대한 커트라인을 네가 정하지 말고, 하나님의 기준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너의 생각이나 가치 판단에 맡기지 말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사실 그렇다면 재판관이 왜 필요합니까? 오늘 이 본문에 등장하는 재판관대로라면 정말 쓸모없는 재판관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뭔가 분명하게 선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나의 권리를 잘 지킬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공의로 재판한다? 말이 좋아서 하나님의 공의지 그것은 어쩌면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닌가?’ 이런 반응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냥 정해진 법률에 따라 ‘이런 사람은 이런 문제가 있으니 몇 조 몇 항에 근거하여 징역 몇 년’ 이런 식으로 처리하는 것이 훨씬 투명할 것 같은데 ‘하나님의 공의’를 운운한다는 것이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영 못마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공의’에 따른 결정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 어떠한 ‘판결’도 불완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결국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인간의 불완정성’입니다. 은연중에 우리의 삶의 자리 가운데 드러날 수 있는 ‘인본주의적 사고’가 오히려 인간을 ‘인간 중심’되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 ‘법체계’가 주인이 되어서 사람들을 ‘부속 다루듯’ 하게 만들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공의대로 판가름 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인간을 자유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 바로 성경의 정신이다.”라는 점을 우리는 오늘 이 본문을 통해 발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현대의 재판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저지른 범죄에 따라 ‘형량’을 매깁니다. 죄질을 따집니다. 그 죄를 저질렀을 당시의 범죄자의 상태도 따집니다. 증거를 분석합니다. 그래서 ‘법률에 의거하여 형’을 확정 짓고, 피고는 ‘감옥살이’를 하든지, ‘벌금’을 뭅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끝입니다. 재판은 ‘그 이후’에 대해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문제입니다. 이런 재판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다시 그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것’에는 사실상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기대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변화’입니다. 사람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이런 재판의 결과에 의해 얻게 된 결과물을 가지고, 그 안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서 그 ‘죄 값’을 치르고 나면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실 우리가 ‘기대’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현대의 재판’에서 그것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공의로 이루어지는 재판에서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입니까?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여하신 ‘율법’의 핵심입니다. 내가 너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았기 때문에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그러하기에 ‘이스라엘의 재판관들’은 단지 ‘법 집행’의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재판이 끝난 후’에 그 ‘벌’을 받는 사람이 그 죄 값을 치른 후에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온전한 사람입니까? 신앙의 연륜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주위의 사람을 향한 배려와 민감함이 더해 가는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해 보자면, ‘자신이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주변을 풍성하게 하는 삶’입니다. 내가 말씀을 더 많이 알고 있으면, 말씀이 부족한 사람에게 나누어서 함께 풍족하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내가 물질적으로 더 많이 가지고 있다면, 부족한 쪽으로 그것을 흘려보냄으로 함께 누리는 것이 바로 참된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내가 말씀을 많이 알아서, 그 말씀을 ‘실수한 사람들’의 상황에 대한 ‘정죄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의 태도가 될 수 없습니다. “내가 노력해서 이만큼의 물질을 쌓았고, 이거 내 마음대로 누린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라고 생각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바른 성도의 태도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제대로 적용된 ‘재판’은 삶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우리가 자꾸 ‘심판’에 대한 그림만 떠올리기 쉬운데, 사실 하나님의 공의의 근원도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에게는 ‘경책’의 도구를 통해 ‘온전함’을 이루려는 목표가 있으셨습니다. 그러한 목표를 이루는데, ‘재판’이 사용되어야 한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또 한편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바탕이 된다는 것은 ‘껍데기’에 목숨 걸지 않는다는 말합니다. 어쩌면 성경에 나타난 ‘재판’의 모습은 ‘법정’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상담실’의 모습에 더 가깝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절차나 형식이 부각되지 않고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주님은 하고 계십니다. 내실은 없고, 껍데기만 있다면 그것만큼 비참한 것은 없습니다. 근본적인 삶의 태도나 자세, 원리로는 ‘나의 성도 됨’이 하나도 갖추어져 있지 않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공의의 열매’를 드러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아! 나도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재판관’들에게 그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정해진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데 급급한 사람이 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19절의 내용처럼 ‘콩고물’에 눈이 간다는 것입니다. ‘뇌물’에 혹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외모를 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인간 자체’로 보기 힘들게 된다는 말이지요.

    목회자인 저도 이 말씀 앞에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양 때’를 품고 돌아보는 것이 주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일인데, 나는 그 일 보다는 ‘판단하고, 분류하는 일’에 열중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뇌물 받고, 외모로 눈을 가리는 재판관’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인본주의의 함정이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 중심’으로 모든 일들을 처리하면, ‘인간 존중’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인본주의’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철저하게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 중심’으로 가면, 결국 ‘엘리트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고, ‘인간 소외’로 이어진다는 것이 수많은 역사의 수레바퀴가 증명한 내용입니다.

    그러하기에 20절의 말씀처럼 ‘마땅히 공의만 따라야’ 우리는 ‘온전한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20절의 ‘마땅히 공의만 따르라’를 원어 성경대로 직역을 해보면, ‘공의, 공의만 따르라’입니다. 공의라는 단어가 두 번 반복해서 언급됩니다. 반복을 지독하게도 싫어하는 ‘히브리어’에서 두 번이나 단어를 반복한다는 것은 ‘강력한 강조’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의 사고’를 하지 않으면, 불평등만 횡행할 수밖에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법을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심판에 대해 변명의 여지가 없도록, 입막음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인간을 ‘꼼짝 달싹 못하게 만들어 놓고’ ‘죽을래! 살래!’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공의’가 임하는 자리에 진정한 자유와 평등이 임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임할 때에만 ‘진정한 삶의 변화’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에 ‘공정함’이 생깁니다. ‘진정한 공정함’은 ‘형량에 따라 감옥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복된 자리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내 생각, 내 방법’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공의가 성도의 마음을 사로잡아야만 사람의 외모, 귀천, 지위의 높고 낮음에 눈 돌리지 않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하기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재판장이 되시게 함’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에 너희 가운데 눈에 보이는 재판장을 세우지만, 결국 그들이 ‘재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판단 받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복된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이 새벽에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다 ‘재판관’으로 세우신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먼저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게 ‘재판관’이 될 수 있습니다. 공동체로 있으면 서로를 향해 ‘판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말이지요. ‘정죄’가 아니라 ‘품어줌’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재판관’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삶이 ‘제도적으로 만들어진 삶’을 뛰어넘게 해야 합니다. 교회 오래 다녀서 집사 되고, 권사 되고, 장로 되고, 목사 되어서 규정되어진 ‘나’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 앞에서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었는데, ‘의로우신 재판장’이 되셔서 친히 죽어주심으로 살려주신 ‘나’로 인정할 수 있는 ‘진정한 재판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삶이 바로 ‘하나님이 재판관 되시는 삶’입니다. 그러한 삶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가 바로 ‘하나님 나라 공동체’입니다. 진정으로 나의 삶의 참 ‘재판관’ 되시는 주님을 기대하며, 그 크신 하나님을 사모하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 ‘공의를 따라 질서가 부여되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전대중앙교회가 그러한 공동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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