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시 100:1-5

◎ 본문: 시 100:1-5
◎ 제목: 찬송 받으시기 합당하신 여호와

1. 본문 개요
    a. 시 100:1-5           감사의 시, 찬송시 중의 찬송시

2. 본문 관찰
    a. 1-2절: 기쁨으로 소리치고, 경배하며 그 앞으로 가라
    b. 3절: 여호와, 그가 하나님이심을 알라
    c. 4절: 감사함으로 들어가 그를 송축하라
    d. 5절: 그를 송축할 이유

3. 적용
    웨스터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1문답은 ‘인간의 창조 목적’에 대한 질문과 답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주된 목적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사람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답합니다. 요약하자면, 인간의 창조 목적은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송하는데 있다는 말이 되겠지요.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쉽게 생각해 보자면, ‘칭찬’을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하나님을 칭찬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어떤 부분을 칭찬하는 겁니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성품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할 때에 이 두 가지를 꼭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칭찬’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누군가를 칭찬할 때에 그 사람의 어떤 부분이 좋은지, 그리고 그 사람이 어떤 일을 잘 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이해할 때 바르게 칭찬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피상적이고 두루뭉술하게 알면 그 칭찬은 올바르지 못할 수 있고, 도리어 상대방을 조롱하는 것이 될 수도 있기에, 하나님의 성품과 하신 일을 바르게 알고 칭찬해야만 하나님을 바르게 찬송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하나님을 칭찬할 때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돌아보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관계가 ‘인격적인 자유로운 관계’가 아니라 ‘수직적이고 권력 구조를 기반으로 한 상명하복’의 관계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 경우에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의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향한 칭찬은 진정성이 사라지고 아첨이나 아부로 전락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격적인 관계’ 안에 있어야만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찬송은 진정하고, 자원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칭찬이 됩니다.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정리를 해 볼 수 있습니다.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주님의 행하신 일과 성품을 알고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칭찬과 경탄’으로 고백해 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의 백성의 ‘찬송’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사람은 바로 그 ‘찬송’을 하나님께 영원히 올려드리기 위해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시편 100편의 시인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여 노래합니다. 왜 이 사실이 감격스러운 겁니까? 이스라엘의 역사적 배경을 따라 살펴본다면 그들은 애굽의 노예였습니다. 그런 그들을 ‘노예’의 자리에서 ‘여호와의 백성’, 즉 자유인으로 신분을 바꾸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출애굽 시킴으로 영원한 자녀로서의 특권을 허락하신 겁니다. 시인은 바로 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합니다.

    왜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놀라운 특권이 될 수 있습니까? 2절에 ‘그의 앞으로 나아갈지어다.’라는 표현과 3절에 ‘우리가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라는 부분이 서로 연결되면 이스라엘의 놀라운 특권을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왕이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특권입니다. 결코 ‘죄’에 오염된 인간은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백성, 자녀 삼으시고 그들을 만나 주십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칭찬하고 높여드릴 유일한 이유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스라엘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차원에서는 도무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들의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그분께 설 수 있고, 그분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도 바로 그 복음에 기대어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하신 일을 높여드리고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찬송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높이고 만유를 향하여 자랑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행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3절에 그 하나님의 일을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하신 찬송 받으실 일은 ‘창조’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모든 것을 만드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창조자이시기도 합니다. 더불어 그분이 찬송 받으실 두 번째 일은 우리를 지으시고 그대로 내버려 두심이 아니라 목자가 양을 기르듯 우리를 다스리시고 공급하시고 인도하며 돌보시는 일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왕’이요 ‘목자’로서 우리 가운데 일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일하심을 높여드리고 만유 가운데 드러내는 저와 여러분의 찬송하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5절에서는 ‘하나님의 성품’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성품 앞에 엎드리는 ‘경배’를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시인은 여호와의 성품에 대하여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른다.’고 고백합니다. 먼저 여호와께서 선하다는 것은 좋음, 친절함, 기쁨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시고 ‘보기 좋다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의 선하심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아름다움과 기쁨으로 충만하게 스며 있음을 인정하며 높여드리는 겁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은 ‘영원히 실패하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배로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달리 언약을 먼저 파기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이미 과거 언약 백성을 위해 행하신 역사 속에서 증명 되었고, 미래에도 변치 않을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끝까지 참는 사랑과 성실하심이 바로 ‘경배의 이유’가 됨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선하신 하나님,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많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 되심을 이 새벽에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한결같이 변하지 않으시는 신실하신 성품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 하나님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마음이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분을 더 따르고 싶고 더 닮아가고 싶어집니다. 그것이 성도가 ‘경배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경배와 찬양은 한번 드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에서 메아리치고,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하는 일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새벽에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분명한 이유와 목적’을 가진 찬양과 경배가 되어야 함을 확인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생생한 하나님의 행하심을 알고 찬양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경배함에 있어서 그의 성품을 나의 삶에서 충만하게 경험하고 맛보고 깨달아서 올려드리는 찬송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하며 높여드리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 그의 자녀’에게만 허락된 특권임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언제든지 나에게 나아오라 초청하셨음을 믿고 더욱 가까이 하나님께로 나아가 만유의 주, 나의 왕, 신실한 목자 그리고 나의 영원한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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