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곤 강도사 / 시 101:1-8

◎본문: 시 101:1-8

◎개요

1-2절 인자와 정의, 완전한 삶의 길 A

3-5절 악행 거부를 서약 B

6절 충성되고 완전한 삶의 길 A’

7-8절 거짓과 악인 처벌을 서약 B’

◎본문연구

시편 101편 표제는 다윗의 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표제에 다윗 이름이 다시 등장한 것은 시편 86편 이후 101편이 처음입니다. 시편 제4권, 시편 90편부터 106편까지에서 다윗에게 속한 시는 101편과 103편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이 시의 배경과 저자와 관련하여 해석자들은 대체로 왕의 시로 분류하여 새 왕의 즉위식이나 가을 신년 예배에서 사용된 것을 보았습니다. 본문 시편 101편은 장르를 규정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이 시를 왕의 즉위식과 그것에 수반된 축하 연회가 배경이라 여기고, 이 시의 화자를 권한과 책임을 지는 왕으로 가정하여 읽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따라서 이 시에서 발화되는 충성 서약은 다윗 언약과 유사한 것으로서 공의와 정의와 성실이 주제입니다. 동시에 이 시에는 애가처럼 탄식하는 지혜 문학적인 요소들과 시편의 다른 제왕시처럼 종말론적이며 메시아를 기대하는 측면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는 왕의 시라고 볼 수 있는데, 왕실과 도성 그리고 땅에 대한 권한과 책임을 지닌 왕이 정의를 수행하겠다는 다짐의 기도이자 노래이며, 선언입니다. 악을 처단하는 심판 의지와 왕이 정의로운 하나님 통치의 대행자처럼 제시되고 있습니다.

본문 1절과 2절은 인자와 정의, 완전한 삶의 길, 그리고 3절에서 5절은 악행 거부를 서약하고 있습니다. 본문 6절은 충성되고 완전한 삶의 길, 그리고 7절과 8절은 거짓과 악인 처벌을 서약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1, 2절과 6절이 평행을 이루고, 3, 4, 5절과 7, 8절이 평행을 이루고 있음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이 시에서 인간 왕은 참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지 다짐합니다. 왕은 가장 먼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다고 다짐하죠. 본문 1절에 등장하는 인자, 헤세들와 정의는 하나님의 대표적인 성품입니다. 즉 인간 왕은 하나님의 성품을 이 땅 가운데 실현하겠다고 한 것이죠. 인자는 자비와 긍휼, 하나님의 실패하지 않는 언약적 사랑의 핵심입니다. 정의는 공정한 법적 판결을 통해 실현됩니다. 지상의 인간 왕이 하늘 하나님의 통치를 재현하는 통로 역할을 다하겠다는 충성 맹세인 것이죠.

왕은 하나님과 자신이 밀접한 언약관계로 묶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왕은 여호와를 부르며 내가 당신을 찬양하겠다고 1절 하반절에서 고백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유지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그를 찬양하는 일이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때 찬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이서 왕은 본문 2절 말씀에 내가 완전한 길에 헌신하겠다고 서약합니다. 여기에서 완전하다라는 형용사는 비난받을 만한 것이 없는, 흠이 없고 정직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길이라는 단어는 행동 양식이나 삶의 여정을 빗댄 은유이죠. 즉 왕이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는 정직한 삶의 길을 걷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입니다.

2절 중반절에서는 왕이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라고 질문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갈망하는 애가와 탄식의 문맥에서 자주 발견되는 질문이죠. 아마도 완전한 길에 헌신하는 삶이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하나님이 함께해주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시인은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안에서 행하겠다고 2절 하반절에 다짐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왕은 완전한 길과 완전한 마음이 분리될 수 없음을 고백한 것이죠. 길은 사람이 걷는다는 것과 연결된 행위 영역이고, 마음은 사람의 의지와 지혜와 양심의 자리입니다. 완전함을 추구하는 삶은 의지와 행동이 결합할 때 현실로 드러납니다.

그러면 흠 없는 완전한 마음과 완전한 삶의 길은 현실에서 어떻게 드러납니까? 왕은 내가 내 눈 앞에서 악한 일을 행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3절에서 표현합니다. 3절에 비천한 것이라는 표현은 악한 일이나 무가치한 일 또는 말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악하거나 무가치한 것은 거짓된 우상을 가리키는 표현인데, 우상은 인간의 욕망에 불을 지피기 마련이죠. 이 맥락에서 내 눈 앞에라는 표현과 욕망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안목의 정욕이라고 하죠. 사람의 신체 기관 중 탐심은 눈으로 보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악한 일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은 우상숭배와 욕망의 늪에 빠지지 않겠다는 서약인 것이죠.

권력을 가진 왕이 탐욕과 우상숭배에 빠지면 백성은 약탈의 대상이 되기 마련입니다. 탐욕스러운 우상숭배는 왕이 경계해야 할 가장 치명적인 악이죠. 이어서 왕은 내가 배교자들이 행하는 것을 미워하여 그것이 내게 들러붙지 않게 할 것이라고 3절 하반절에서 다짐합니다. 배교하다라는 뜻은 법을 어기고 한계를 넘는 행위를 뜻하죠. 하나님이 정하신 삶의 기준이나 가르침에서 벗어난 일탈을 말합니다. 왕은 하나님이 정한 경계를 넘은 일탈자들의 행위를 혐오하겠다고 강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죠. 그러니 선을 넘은 자들은 왕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왕은 사악한 마음, 즉 거짓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라고 4절에서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에서 일탈한 자들을 멀리하니 자연스럽게 진실 없는 가짜 마음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이죠. 왕은 지혜 교훈을 마음에 깊이 간직한 사람처럼 마음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왕은 악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4절에서 보여줍니다.

왜곡된 어떤 악한 일에도 연루되지 않겠다는 의지인 것이죠. 온전함과 정의 수호에 대한 왕의 책임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이웃을 비밀리에 헐뜯는 자는 침묵하게끔 만들겠다고 5절 서두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도 은밀히 헐뜯는 자까지 적극적으로 응징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죠. 헐뜯는 것은 중상모략이나 거짓 증거 행위와 관련된 것이니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왕의 이러한 다짐이 실행된다면 공공장소에 드러나는 악행만이 아니라 은밀한 곳에서 행한 악인들의 중상모략은 만천하에 폭로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무게로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5절 하반절에 따라오고 있습니다. 왕이 완전한 길에 주목하는 것을 자기의 소명으로 여기니 눈과 마음의 교만이 권력자에게 흔한 태도이며 정의 실현을 방해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왕은 하나님 통치의 대리자로서 조심하지 않으면 신적 정의를 가로막을 위험성이 큽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왕은 하나님 뜻에 따라 하나님 통치의 대리자로서 합법적인 왕의 임무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동시에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는 것이죠.

말씀을 맺겠습니다.

정의가 가물가물한 시대에도 시인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하나님의 통치 방식인 인자와 정의를 실현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흠 없는 완전한 마음으로 통치하겠다고 약속하죠. 하지만 그 정의로운 통치의 완성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라고 믿고 구합니다. 오늘 우리가 정의와 공의의 자리를 지키고, 그러면서도 마음이 분노로 다치지 않고 사랑을 유지하며 기다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 주권을 믿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하나님께서 다스린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오늘 시편 101편 시인과 같이 우리도 우리의 삶에서 인자와 정의를 실현하기를 원하고 다짐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의 삶에서 드러내야 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인정하고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심으로 우리의 마음이 충만하게 채워지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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