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곤 강도사 / 시 102:1-11

◎본문: 시 102:1-11

◎개요

1-2절 나의 기도와 부르짖음에 응답하소서

3-11절 기도와 부르짖음의 내용

◎본문연구

본문 시편 102편은 표제가 매우 독특합니다. 고난 당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의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로하는 기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마음이 상한 자가 여호와를 부르며 얼굴을 숨기지 마시고 부르짖음에 응답하시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이죠. 기도를 뜻하는 히브리어 테필라라는 단어는 도움을 구하는 간청의 기도입니다. 시편 102편 1절부터 11절까지는 개인적인 탄식의 특성과 12절부터 28절까지의 말씀, 즉 후반부의 공동체적인 요소가 혼합되어 있는 시편입니다. 본문에서 시인은 황폐한 마음을 날짐승에 빗대고, 시드는 풀에 빗대어 근심을 토로하면서 하나님께 바짝 다가가는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본문 1절과 2절에서 시인은 고통 속에서 부르짖습니다.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도움을 청하는 나의 부르짖음이 당신께 상달되게 하소서! 기도가 하나님께 도착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괴로움의 정점, 고통의 정점을 지나고 있었다는 뜻이겠죠. 괴로움이 깊어질수록 시인의 언어도 치열해집니다. 2절 상반절에서 나의 괴로운 날에 당신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말라고 간청하죠. 고통의 나날을 견디면서 시인들이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하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환난의 시간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니, 제발 나타나서 도와주시기를 열망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이 얼굴을 보여주신다는 것은 구원과 은혜를 베푸신다는 뜻이죠. 민수기 6장에 이렇게 말씀하죠.

민수기 6: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시인은 자신의 처지가 괴롭지만, 고통의 정점에서 하나님이 여전히 곁에 계심을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2절 하반절에서 시인은 좀 더 직접적으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시고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2절에 나의 괴로운 날에, 그리고 내가 부르짖는 날에, 이 두 문장이 평행을 이루면서 괴로움의 크기와 깊이가 증폭시킵니다. 이때 숨지 말아 달라는 간구가 귀를 기울여 속히 응답하소서라는 간청으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기력과 두려움이 엄습하는 날에 부르짖는 소리를 외면하지 말라는 절절한 호소인 것이죠. 왜냐하면 가장 절박한 시간, 하나님의 함께하심만이 희망이기 때문이죠.

3절과 4절에서 계속해서 시인은 자신의 고통을 토로합니다. 그러고서 하나님이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해 주셔야 할 이유를 분명히 제시합니다. 그래서 3절 첫 글자가 히브리어로 키라는 단어로, 왜냐하면이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2절에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3절에 이유로, 왜냐하면 내 날이 연기처럼 소멸하고 내 뼈들은 화덕처럼 타오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숯이라는 단어는 정확히 화덕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온몸이 불에 타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그 타는 듯한 통증이 연기가 사라지듯 자신의 수명을 단축할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즉, 덧없이 순식간에 사라질 인생의 시간을 연기에 빗대어 묘사한 것이죠.

뼈들이 불타는 듯한 고통 때문에 음식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시인은 내가 음식 먹는 것도 잊고, 내 마음은 풀처럼 시들어버렸다고 4절에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음식조차 입에 댈 수 없어 시든 풀처럼 생기없이 말라가며 수척해진 자신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타는 듯한 몸의 열기와 통증이 식욕을 앗아가고, 마음은 말라비틀어진 상태인 것이죠. 4절에서 마음이라는 단어는 감정의 자리일 뿐만 아니라, 심장을 뜻하는 단어이며 활력의 자라입니다. 정신과 의지의 자리인 것이죠. 그러나 시인의 의지, 감정, 정신이 모두 바짝 말라버린 상태임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은 계속해서 5절에서 나의 탄식 소리로 인해 나의 살이 뼈에 붙었다고 탄식합니다. 시인의 신음하는 탄식 소리, 곧 그의 고통에 찬 부르짖음이 고통의 깊이를 드러내죠. 마치 욥이 친구들 앞에서 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어 남은 것이라곤 겨우 잇몸뿐이라고 호소하며 자기를 불쌍히 여겨주기를 바라는 마음만큼이나 처절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욥기 19:20 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몸 뿐이로구나

21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남은 힘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탄식하는 것 뿐인 것이죠. 그가 어떤 상태인지 자신을 광야의 올빼미,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다고 6절에서 말합니다. 올빼미와 부엉이는 눈이 크고 밤에 활동하는 야행성 맹금류입니다. 밤의 날짐승이 활동하는 시간에 사람은 깊이 잠들어 휴식을 취하며 몸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 일반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앞서 3절에서 고백했듯이, 뼈가 타는 듯한 고통에 잠을 청할 수 없어서, 눈을 부릅뜬, 밤의 날짐승에 빗대어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괴로움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더군다나 괴로움에 외로움까지 더해집니다. 7절에서 시인은, 내가 밤을 새우니 마치 지붕 위의 홀로 있는 새 같다고 호소합니다. 6절에서 날카로운 시선으로 깨어 있는 밤의 날짐승에 자신을 빗대어 표현한 것처럼, 시인은 밤에도 깨어 있습니다. 모두가 잠든 시간 홀로 깨어 있는 것, 이 자체로 고통인 것이죠.

그런데 가족이나 친구들과도 분리된 채 홀로 외롭게 앉아 있는 새에 빗대어 처량한 자기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시인이 당장 겪고 있는 사회적 차원의 고통입니다. 공동체에서 분리된 채 홀로 있는 것이죠. 사회적으로 고립된 상태의 외로움입니다. 분리된 상태의 홀로 외로운 한 마리 새처럼, 사람이 모두 잠든 밤 광야와 황폐한 곳의 날짐승처럼 깨어 있는 고통이 합세하여 괴로움이 가중되는 상황인 것이죠.

그런데 시인의 고통을 강화하는 더 큰 괴로움이 또 있습니다. 시인은 내 원수들이 종일 나를 비방하고, 나를 조롱하는 자들이 나를 가리키며 맹세한다고 8절에서 호소합니다. 이러한 말은 하나님이 마치 냉담하게 자신을 돌보지 않으신다는 불평과 호소라는 두 가지 측면을 드러냅니다. 일반적으로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라고 조롱했을 것입니다. 이런 대적자들 때문에 시인의 고통은 더 깊어집니다. 그래서 시인이 나는 재를 양식처럼 먹고 눈물 섞인 물을 마셨다고 9절에서 탄식하는 것이죠. 시인이 먹고 마시는 것은 몸의 기운을 북돋우는 음식이 아니라 괴로움과 슬픔의 재료입니다. 재와 눈물은 지독한 슬픔을 상징하죠. 이것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시인의 괴로움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죠.

말씀을 맺겠습니다.

본문 말씀 시편 102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시인은 아무 소망도 없이 절망하고 있음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인을 버리셨다면, 시인에게는 희망이 없겠죠. 하지만 이러한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면하는 시인의 언어에는 오히려 유일한 소망이 하나님께 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거침없이 고통과 불평을 토로하는 시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마저도 삶의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삶의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면, 그 고통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이 달라져야 하겠죠. 불평을 토로하기보다는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믿음이 성숙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죠. 고통 중에도 유일한 소망이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분께 다 토로하며, 삶의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에, 불평보다는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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