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곤 강도사 / 시 102:12-28

◎본문: 시102:12-28

◎개요

12-22절 신뢰와 확신

23-24절 탄식

25-28절 신뢰와 확신

◎본문연구

시인은 하나님을 향한 확신과 탄식 사이에 서 있습니다. 시편 102편 전반부인 1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이 탄식에 초점을 두었다면, 후반부 시작은 확신에 차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탄식과 확신의 언어로 끝맺는 구성입니다. 즉 개인적인 애가 형식이지만 신뢰와 확신, 그리고 찬양이 서로 어우러져 있는 것이죠. 시인의 공동체적인 결속은 회복된 영화로운 예루살렘에 대한 예배의 광경을 마음 속에 그리는 것으로 나타나 있죠. 무엇보다 12절부터 22절까지의 말씀은 포로기를 겪으며 좌절하고 절망하는 의인들의 마음에 희망의 불씨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는 여호와 이름을 강조하듯 하나님의 영원하심에 대한 확증과 만왕의 왕이신 그의 위엄을 예루살렘과 연결하여 우주적인 찬양을 끝맺음을 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탄식을 멈추고 시선을 하나님께로 향합니다. 여호와가 영원히 왕좌에 앉아계신 것과 여호와에 대한 기억이 대대에 이를 것이라고 12절에서 확신하죠. 12절은 첫 글자가 접속사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시인의 날이 그림자처럼 순간이라는 탄식에 찬 고백과 대비되죠. 시인이 자기 생명의 덧없음, 곧 생명의 일시성을 노래했다면, 이제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와 그분에 대한 기억, 그의 명성이 대대로 영원할 것을 확신하는 목소리로 바뀌었습니다. 더 나아가 여호와에 대한 기억, 곧 그의 탁월하고 능숙한 솜씨와 거룩한 이름이 대대로 이어질 것이라 고백합니다. 기억은 여호와가 행하신 것을 기념하는 표지이죠. 시인은 좀 더 구체적인 언어로 신뢰를 표현합니다. 13절에 당신이 일어나셔서 시온을 긍휼히 여기실 것입니다. 시온을 향해 은총을 보여줄, 정해진 때가 왔기 때문입니다.

시온은 언약과 하나님의 통칭을 상징하는 장소입니다. 그 자체로 여호와의 은혜를 증언하는 기념물이죠. 그런 시온을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가엾고 불쌍히 여기는 모성애에 기반한 사랑을 보여주는 행위이고, 은혜를 베푸는 것은 친절하고 자비로운 행위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언약을 맺을 때 보이신 하나님의 대표적인 성품을 보여달라는 간절한 호소인 것이죠. 이제 하나님의 근본적인 속성을 보여주실 정해진 때가 이르렀다면서 하나님이 행동하시기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시인은 14절에서 하나님께 당신의 종들이 시온의 돌들을 기뻐하고 시온의 티끌도 은혜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동정심을 발휘하도록 예루살렘의 파괴된 상태를 상기시키려고 애쓰는 태도입니다. 즉 파괴된 시온을 원상태로 회복시켜 주시기를 간구하는 호소인 것이죠. 예루살렘 곧 시온의 파멸은 하나님 약속과 상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시온을 향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나타날 것을 믿고, 그때 뭇 나라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고, 이 땅의 모든 왕이 주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이라고 15절에서 확신합니다. 그리고 16절에서 시인은 뭇 나라들과 모든 왕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를 주께서 시온을 건설하시고 그의 영광 가운데 나타나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시온의 회복은 백성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시온의 재건 그 자체가 여호와를 계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17절에서 시인은 여호와가 빈궁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의 기도를 멸시하지 않으셨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시온에 임하신 것은 빈궁한 자, 즉 헐벗은 자, 가장 취약한 자들의 기도를 듣기 위함입니다. 시인은 하나님만이 힘없는 자들을 해방하시고 그 기도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시인은 불평과 탄식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무한 신뢰를 표현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해 기록되고, 창조될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할 것이라고 18절에서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창조될 백성은 누구인가요?

문맥상 예루살렘이 재건되고 해방된 포로들로 구성된 새로운 세대를 뜻합니다. 평행관계를 고려해도 장래 세대와 동의어처럼 사용되었습니다. 시인은 예루살렘의 회복과 헐벗은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여호와를 믿고, 이것을 목격한 자들의 기록을 통해 장래 세대까지 여호와가 찬양받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죠.

19절에서 시인이 찬양의 이유를 말합니다. 여호와가 그의 높은 성소에서 굽어보시고, 하늘에서 땅을 살펴보셨기 때문이고, 또 20절에서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고, 죽게 된 후손을 해방하시기 때문이라고 찬양의 이유를 말합니다. 그래서 19절과 20절은 찬양의 이유에 대한 요약적 진술이죠. 시인은 미래를 상상하며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가지신 분인지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굽어보시고, 살펴보시고, 들으시는 분이고, 후에는 해방하신다는 것이죠. 시인은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목적을 밝힙니다. 즉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의 영광이 예루살렘에서 선포되기 위함이라고 21절에서 말합니다. 22절에서 그때 민족들과 나라들이 함께 모여 여호와를 섬길 것입니다. 본문 12절부터 22절까지의 말씀에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가 여섯 번 반복됩니다. 그리고 시온이 세 번 반복될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시인은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시인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경험한 자들이 그의 이름을 시온, 곧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기는 곳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선포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온 열방이 함께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 곧 예루살렘에서 선포할 것을 확신합니다.

비록 자기 날은 풀이 시듦 같고 연기가 소멸하는 것 같지만, 영원한 주께서 계시고 그 주를 기억함은 대대에 이어지니, 이제 주께서 그 신앙을 헛되이 만들지 않고 일어나 무너진 데를 회복시키실 날이 다 되었음을 굳게 믿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시온을 회복하심으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그들을 업신여기는 뭇 나라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며 주의 영광을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 행동하시는 하나님, 건축하시는 뭇 나라의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의 인생에도 우리나라 교회에도, 그리고 조국과 전쟁이 한창인 세상 한가운데서도 일어나 역사하시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 것이죠.

하나님은 가진 자, 강한 자의 편에 서지 않으시고 빈궁한 자와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가난한 자의 기도를 멸시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시인에게는 희망이자 소망이죠. 세상은 죽이기로 작정한 자를 해방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니 시인은 탄식을 멈추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그분의 영예를 선포할 수 있습니다. 시인의 나라의 구원을 보면 온 나라와 민족들이 주를 경외하며 섬기게 될 것입니다. 시인의 곤궁과 약함과 가난과 갇힘이 하나님의 능하심을 드러낼 최적의 환경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찬양입니다. 그리고 시인의 희망은 단지 바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근거로 한 확고한 믿음인 것이죠.

이 시는 결국 절망을 넘어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시대의 어둠 사이에서 자신의 처지는 여전하지만, 더 먼 미래의 후손들까지 하나님 앞에서 안전할 것을 확신하는 시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도 이 시인과 같이 절망을 넘으시기 바랍니다. 절망을 넘어 하나님의 향해 신뢰하고 확신하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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