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막 1:35-45

◎ 본문: 막 1:35-45
◎ 제목: 내가 원한다

1. 본문 개요
    a. 막 1:35-39           전도를 위해 왔노라
    b. 막 1:40-45           나병환자를 치유하심

2. 본문 관찰
    a. 35절:   새벽 미명 한적한 곳에 나가 기도하심
    b. 34-39절:   여러 마을에서의 복음 전도
    c. 40절:   한 나병환자의 치유 간구
    d. 41-42절:   그를 먼저 깨끗하게 하심
    e. 43-45절:   침묵할 것을 엄히 경고하심

3. 적용
    구원 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이미 죄로 망가져 있기 때문입니다. 죄로 망가진 세상에서의 삶은 늘 뒤죽박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세상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만나게 되는 아픔과 슬픔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현재적 심판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 각 개인의 죄 때문에 현실에서 문제가 생긴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죄’로 인해 망가진 세상에 대한 총체적이고 현재적 심판의 결과로 ‘고통과 고난’이 현실 세계에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서 만나게 되는 ‘삶의 문제’를 만나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을 향해 서운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성도로 산다면 우리 상황을 해결해 주셔야 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이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주님은 알고는 계실까?”라는 생각으로 복잡하고 혼란스러울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 곤란한 상황이 반복되거나 지속되면 우리 주님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라는 물음표가 내 마음을 가득 채우기도 한다는 말이지요.

    오늘 본문은 35절에는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35절 말씀의 조금 앞부분인 32-34절에는 예수님 앞으로 각종 병이 든 매우 많은 사람이 나아와서 고침 받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의 삶은 늘 ‘요구받는 삶’이었을 겁니다. 쉽게 지칠 수밖에 없는 삶이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지칠 수밖에 없는 인생 가운데에서 한가지 해결책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바로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신 일’입니다. 즉 성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예수님의 지치고 힘든 사역 가운데에서 다시 힘 나게하는 원동력이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인생 가운데에 만나게 되는 수많은 문제들로 인해 끊임없이 요구받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은 가정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늘 수고하며 일합니다. 어머니들은 자녀들의 각종 필요들을 채우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렇다면 자녀들은요? 그들도 부모로부터 그리고 사회로부터 갖춰야 할 것에 대한 요구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인생은 끊임없이 요구받는 삶을 삽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고난과 고통을 발생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주십니다. 먼저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님은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어떤 일도 하기 전입니다. 어떤 결정도 내리기 전입니다. 모든 일들의 첫 자리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바로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루의 결정과 선택을 위한 답을 구하던 일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고난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입니다. 항상 우리의 일상의 첫 자리를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하루를 살아낼 힘을 얻고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이어지는 40-45절은 한 나병환자를 고치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분주하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예수께서 한 나병환자를 만났습니다. 예수님에겐 우연한 만남이지만, 그 나병환자에게는 의도된 만남이었습니다. 나병환자는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지금 예수님 앞에 나타나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많은 공적 장소에 나타나면 돌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목숨을 걸고 의도적으로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나아가야 만 산다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야만 살수 있다는 간절함이 자신의 인생을 건 결정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과 고통의 문제로 인하여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의 여부 조차 흔들린다 할찌라도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결국 하나님께 나의 문제와 고통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결국 궁극적으로 나의 고난과 고통을 해결하실 이는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본문의 나병환자가 자신의 인생을 건 결정을 했던 것처럼 우리도 언제나 우리의 전부를 오직 하나님께 맡기고 그 분께 만 나아갈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만족과 답을 얻을 수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린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향하여 ‘원하시면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간청합니다. 나병환자는 율법을 어기는 ‘무례’를 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그의 중심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으로 가득합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면, 그분의 뜻이라면 해결받을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워서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겸손입니다. 자신은 구원 얻을 자격이 없음에도 예수님의 능력 있으심을 온전히 인정하는 나병환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이 나병환자의 모습으로 서야 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고통과 고난이 있으니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 당신께서 당연히 내 문제를 해결해 주셔야 합니다.”라고 마치 빚쟁이 빚 받으러 오 듯 예수님께 나가는 태도는 온당치 않습니다. 우리에게 당연한 구원은 없습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은 오직 겸손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모든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병자를 보시고는 41절에 손을 내미시면서 ‘내가 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병환자는 결코 손대어서는 안 됩니다. 손을 대면 동시에 나도 부정하게 될 것이라고 율법에 명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만짐으로 인한 부정의 상황을 감수하고 병자를 만지십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부정한 나병환자를 만지고 그를 치유하게 했습니다. 나병환자는 자신의 병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눌려 왔던 마음도 치유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사역의 초점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끊임없이 요구받고 바쁜 가운데에서도 긍휼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으로 감당하십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사람의 구원’에 초점 맞추어 사역하셨습니다. 그 사랑이 지금 여기 있는 저와 여러분을 살렸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고난과 고통’에만 초점을 맞추지만, 지금의 나를 존재하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보혈을 쏟으신 그 사랑은 기억하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그러하기에 ‘다시 십자가의 사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 주님의 사랑을 마음에 담아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사랑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새벽에 ‘하루의 첫 시작’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예수님의 모습과 큰 용기로 주님께 나아가는 나병환자의 행동으로 나의 삶을 경영해 가기로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도, 나병환자도 ‘그 방법 밖에는 없기 때문’에 그 선택을 하였습니다. 오직 예수의 보혈만이 내 문제의 해결책임을 깨닫기 원합니다. 다 제쳐두고 가장 먼저 오직 주님께만 나의 문제를 내려놓고 풀어주시기를 구할 때, ‘내가 고치기를 원한다.’ 사랑스럽게 말씀해 주시는 그 분의 음성을 다 누리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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