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막 2:1-12


◎ 본문: 막 2:1-12
◎ 제목: 중풍병자를 향한 죄 사함 선포

1. 본문 개요
    a. 막 2:1-5           가버나움 중풍병자
    b. 막 2:6-12           죄 사하는 권세


2. 본문 관찰
    a. 1-2절: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심
    b. 3-5절:   한 중풍병자의 등장
    c. 6-7절:   종교지도자들과의 첫 충돌
    d. 8-12절:   인자의 죄 사하는 권세


3. 적용
    갈릴리에서 순회 전도를 마친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은 베드로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기다렸던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의 집으로 몰려옵니다. 이렇게 인산인해를 이룬 그 때 한 중풍병자의 침상이 지붕 위에서 내려옵니다. 중풍병자의 네 친구가 사람이 너무 많아 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갈 방법이 없다 보니 지붕에 구멍을 뚫고 환자를 달아 내린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5절에 이 네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향하여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선언을 하십니다. 분명 중풍병자는 ‘병 고침’을 바라고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 사함을 선포하는 생뚱맞은 장면을 연출하신 겁니다. 예수님의 선언을 들은 병자도 당황했고 함께 있던 서기관들도 당황했을 겁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병 고침을 통해 죄 사함의 권세도 알도록 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하지만 과정이 의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일을 행하셨을까요? 그리고 무엇을 기대하신 걸까요?

    우리가 오늘 본문을 보면서 먼저 던져야 하는 질문은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여러 가지 대답을 할 수 있지만, 지금 우리가 살피고 있는 본문의 맥락에서 알맞은 대답은 ‘예수님은 단순히 병을 고치시는 분이 아니시다.’라는 답입니다. 예수님의 궁극적인 정체성은 복음을 전하고 죄를 사하는 ‘메시아’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기 때문에 믿음 있는 자를 칭찬하시고 의심하는 자를 위해 능력으로 자신의 메시아로서의 정체성과 권세를 확증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여러 모양으로 드러납니다. 6-7절을 보시면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신성모독’이라고 비난한 것은 분명 마음속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8절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는 그들의 ‘신성모독’이라는 생각에 대해 반박을 이어가시는 것을 봅니다. 이미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모든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알고 계십니다. 놀라운 능력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놀라운 능력으로 자신의 메시아 되심을 드러내십니다. 하지만 단순히 능력만 드러내심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찾는 자에게 문을 열어주시고 더 깊은 관계를 허락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들 때문에 예수님께로 오지 못하자 지붕을 뜯어서 자기 친구를 침상 째로 내린 네 친구의 행위를 ‘사랑’으로 평가하셨고, ‘믿음’이라고 해 주셨습니다. 그들의 행동을 꾸짖지 않으시고, 있는 그대로 용납하시고 받아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도 그러한 예수님께 참으로 정직하고 신실한 마음으로 나아갈 때에 우리를 만나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예수님의 ‘죄 사함’의 선포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서기관들은 놀라면서 ‘신성모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지금 하신 선포는 당연히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놀람과 신성모독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서기관들의 반응에 대해 ‘비난’으로 응수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능력으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9절에 서기관들의 마음의 중심을 아신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도리어 물으십니다. 이 질문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겉으로 상황이 드러나는 부분에 있어서는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는 말이 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했다가 만약 상을 들고 일어나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은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관점에서는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즉 그 중풍병을 낫게 하는 일이 훨씬 쉽다는 겁니다.

    하지만 10절에 언급 된 바 “나 예수가 메시아로서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 너희에게 알게 하려고 죄 사함을 언급한 것이다.’”라고 예수님께서는 친절하게 말씀해 주신 겁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는 ‘주어진 일의 경중’이 없다는 겁니다. 이것도 저것도 예수님은 다 가능한 능력의 메시아라는 말이지요. 하지만 이 땅에 오신 가장 중요한 목적인 ‘죄 사함과 영혼 구원’을 가르치시기 위해 예수님은 ‘신성모독’이라는 오해가 될 만한 선언을 하셨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신앙의 여정 가운데에서 주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의심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만약 예수님에 대해 바르게 알고 있다면, 그 분에 대해 바르게 반응하려는 태도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오늘 대조를 보이는 ‘중풍병자와 네 친구’와 ‘서기관’을 보십시오. 이 두 부류는 그들의 앎과 반응에 있어서 극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아니고서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은 신성모독이라는 걸 알 만큼 율법에 능통합니다. 하지만 결코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중풍병자와 네 친구들은 율법을 모릅니다. 예수님이 죄 사함에 대해 말씀하셨든지 안 하셨든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예수님만이 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의 능력을 좇아 병도 낫고 믿음으로 예수님을 만나 그 믿음이 더 강해지는 선순환이 일어나고 있음을 우리가 보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새벽에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너희는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태도는 ‘앎에 대한 반응’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가 결국 예수님에 대한 태도를 결정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참 구주요. 성자 하나님이심을 바르게 인정한다면 그분을 향한 온전한 믿음의 태도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저 내가 구원 받는데 있어서 조언이나 도움을 주는 분 정도로 생각한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대하는 태도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서기관들이 비록 예수님을 신성모독하는 자라 여겼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능력을 보고 깨달았다면 태도를 바꾸었을 겁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하기에 자신의 인생을 그 분께 맡기는 것 또한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지붕을 뚫어버렸습니다. 오직 예수가 필요했고, 예수를 의지했기 때문에 지붕을 뚫고 그 많은 인파를 헤치며 예수님께 닿을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병자의 치유와 함께 믿음을 칭찬받고 죄 사함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새벽에 늘 예수님을 바로 알고, 그 분과의 바른 관계 안에 있기를 소망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그분에 대해 올바로 알고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단순히 우리를 치료하시고 위로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창조주이시고, 구원자이실 뿐만 아니라 재림하실 때에 심판 주로 오실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로 알 때에 그분을 바르게 예배할 수 있습니다. 참된 구원과 신앙 생활을 위해 주님을 찾기 원합니다. 의심으로 시작하든 믿음으로 시작하든 관계없이 결국 ‘진실한 관계’를 추구하는 자를 외면치 않으시는 우리 주님을 기억하며, 늘 그분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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