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막 3:1-19


◎ 본문: 막 3:1-19
◎ 제목: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1. 본문 개요
    a. 막 3:1-6           안식일, 손 마른 사람의 치유
    b. 막 3:7-12           많은 무리들을 치유
    c. 막 3:13-19           열 두 제자를 부르심

2. 관찰
    a. 1-2절:   예수를 고발할 기회를 엿보는 종교지도자들
    b. 3-6절:   참된 안식일에 대하여
    c. 7-12절:   무리들을 고치시고 더러운 귀신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지 말라고 경고하심
    d. 13-15절:   열 두 명을 제자로 부르시고 세우심
    e. 16-19절:   열 두 제자의 명단

3. 적용
    우리는 흔히 ‘교회의 양적인 부흥’을 생각할 때에 교회가 진리를 전하고 선행을 행하면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인정하고 몰려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지에 대하여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가장 처음 복음이 전파 되었던 순간인 예수님의 경우를 확인해 보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의 전파와 선행의 모본’이 되시기 때문이지요. 과연 예수님 당시에 세상은 예수님이 전하시는 복음과 치유의 역사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지 한번 살펴보기 원합니다.

    다시 안식일이 되었고, 예수님께서는 원래 안식일에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1절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을 발견하십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의도적으로 이 회당에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2절을 통해 발견합니다. 2절에 ‘사람들’은 다름 아닌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침으로 말미암아 고발할 빌미를 얻으려고 주시하고 있었음을 2절이 우리에게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상황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3절에 그 손 마른 사람을 한 가운데에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리고는 4절에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그 회당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하였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반응을 보면 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5절에 예수님께서 ‘그들의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셨다.’는 표현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서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한 예수님을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이 배척한 것으로 보입니다.

    손 마른 사람은 그 즉시 회복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하여 ‘바리새인들’은 나가서 ‘헤롯당’이라 부르는 자들과 손을 잡고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거룩’을 매우 중요시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두매 출신인 헤롯’과 관련된 그의 측근 정치 집단인 ‘헤롯당’을 매우 증오하고 멸시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그렇게 자신들의 정적에 가까운 헤롯당과도 손을 잡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만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눈엣 가시와 같은 존재로 생각했다는 것을 방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오직 진리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능력을 보이시고 선한 일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예수님에게 돌아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꾀하는 것, 그것만이 유일하게 예수님에게 돌아오는 반응이라는 겁니다. 우리에게 이런 상황이 더 충격인 이유는 지금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회’는 그들 나름대로는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자부하는 사회라는 겁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진리와 치유와 선행에 대해 ‘죽이겠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지요.

    우리는 이런 상황을 보면서 무엇을 직시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세상 가운데 가득한 ‘죄’에 대한 인식입니다. 결코 세상의 죄악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는 겁니다. 세상은 결코 ‘복음’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이려 했다면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반응하여 그 복음을 전파하는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그럴 것임은 너무나 명백하다는 사실이지요.

    이러한 세상의 반응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분은 결코 세상의 배척에 주눅 들거나 억울해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악한 본질에 대해 탄식하고 노하셨습니다. 하지만 탄식과 분노로 결말지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결국 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셨다는 겁니다. 치유와 회복의 역사는 그치지 않고 거듭되었습니다.

    이어지는 7-12절에는 더 많은 무리를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거듭 묘사합니다.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의 핵심은 구원이 필요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계속 수행하는데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 국한하지 않으시고, 8절에 유대와 예루살렘,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 그리고 다른 나라와의 국경 인근인 두로와 시돈 근처까지 크신 일을 행하십니다. 점점 예수님은 ‘복음의 영향력’을 넓혀 가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이 일을 통해 세상의 인정을 받으시려 하심이 아닌 것을 또한 본문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11절에 ‘더러운 귀신’들이 떠나가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떠드는 것에 대해 1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결코 자신을 나타내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에게 더 중요한 것은‘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었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탄은 참 교묘합니다. 11절에 더러운 귀신들이 쫓겨나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공표하려 하는 것은 무리에게 메시아적 기대를 한껏 주입해 예수를 높여 결국 로마와 유대교에 의해 죽음에 이르게 하려는 사탄의 자극적 발언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것을 알고 계셔서 계획된 사역을 위해 사탄에게 침묵을 명하시고, 때로는 무리로부터 자주 스스로를 격리시켰던 겁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전대중앙교회가 세상 가운데 여러 가지 섬김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탄은 그러한 마음의 욕망의 틈을 비집고 들어서 우리를 타락하게 만들려 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예수님께서도 명예를 추구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데 집중하셨다면 주님의 교회인 우리 전대중앙교회도,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인 저와 여러분의 도리도 당연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 되어야 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3-19절은 예수님께서 12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예수님 당신을 통해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은 주님의 제자들을 통해 계속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기대하시면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분의 의지가 제자들을 부르시는 일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그런데 12제자들의 면면을 보면 결코 예수님께서는 ‘세력을 가지거나 부자인 사람’들을 선택하지 않으셨음을 봅니다. 적은 수이고 연약한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통해 세상에 맞서는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계속하여 기대하셨습니다.

    이 새벽에 숫자나 영향력의 화려함이 아닌 ‘진리에 대한 진실함’을 지속하는 것이 저와 여러분의 사명임을 깨닫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죄로 망가진 세상에서 진리와 선한 삶이 꼭 긍정적인 결과를 보증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주님께서 먼저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예수님이 그러하셨든 세상의 반응에 상관없이 늘 하나님의 뜻을 소중히 여기며 지속적으로 세상과 다르게 살기를 결단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순종과 최선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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