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막 4:26-34


◎ 본문: 막 4:26-34
◎ 제목: 주님이 일하신다

1. 본문 개요
    a. 막 4:26-29           자라는 씨의 비유
    b. 막 4:30-32           겨자씨 비유
    c. 막 4:33-34           비유와 해석

2. 본문 관찰
    a. 26-27절: 뿌려진 씨
    b. 28-29절: 땅의 수고
    c. 30-32절: 매우 작은 겨자씨의 생명력
    d. 33-34절: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신 예수님

3. 적용
    필립 얀시가 쓴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라는 책은 믿음으로 구원 받았으나, 여전히 세상에서 당하는 고통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왜 구원 받은 사람에게도 여전이 ‘고통의 문제’는 존재할 수밖에 없는 걸까요? 신자의 현실이 ‘이미와 아직’의 상황 가운데 끼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이미 구원받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아직’ 그 구원이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더불어 ‘이미’ 이 땅 가운데 임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입니다.

    ‘이미와 아직’ 사이의 갈등은 남의 일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의 현실입니다. 구원 받으면 끝이 아닙니다. 육신의 생명이 남아 있는 한 여전히 살아 내야 할 인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인생은 결코 ‘비단길, 꽃길’이 아닙니다. 여전한 염려와 고통이 우리를 집어 삼키려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하나님은 무엇을 하실까요?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런 고통과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은 있는 것일까요? 라고 하나님께 질문하고 싶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두 가지 비유가 나타납니다. 하나는 ‘스스로 자라는 곡식’에 대한 비유이고, 다른 하나는 ‘겨자씨 비유’입니다. 첫 번째 비유부터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26절에 하나님 나라를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린 것’이라고 말합니다. 땅에 뿌려진 씨앗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자라는지에 대해 우리가 비디오카메라를 장시간 계속 켜두고 관찰하지 않는 한 알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게 씨가 자라는 것을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나서 자란다.’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그 씨앗이 자라서 열매 맺는 이유에 대해 인간은 답을 낼 수 없습니다.

    농부는 밤낮 자고 일어나는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가지만, 그러한 일상이 결코 씨가 자라는 것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심지어 농부가 일을 멈추고 잠을 자는 중에도 씨는 자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씨의 자람을 농부조차 인지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곡식이 자라서 열매 맺어 추수하기까지의 과정을 28-29절이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싹이 나고, 그 다음은 이삭이 되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 충실한 곡식이 되어, 열매가 다 익게 되면 추수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파종을 하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성육신하셔서 이 하나님 나라를 가져 오셨고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파종’하신 셈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은밀한 중에 결국은 완성될 겁니다. 비유에서 ‘추수’에 해당하지요. 그런데 이 하나님 나라는 멈추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완성을 향해 나아갑니다. 즉 ‘자람과 성숙’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 어느 것도 떠벌려 지는 것은 없습니다. 은밀한 중에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했고, 점점 완성을 향해 나아갑니다.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하나님 나라의 성장의 은밀성’입니다.

    더불어 하나님 나라는 ‘확실성’을 담보합니다. 그 과정은 은밀하게 진행될지 모르지만, 결코 그 결과물까지 숨겨지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뿌려진 씨가 죽거나 열매를 맺지 못할 가능성은 없다는 말입니다. 반드시 자라고 결실하여 추수의 때를 맞이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도 이와 같다는 겁니다.

    이렇게 은밀하지만, 확실히 열매 맺는 ‘씨’는 땅이 스스로 열매 맺는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즉 이 씨를 열매 맺게 하는 주체는 다름 아닌 ‘땅’이라는 말입니다. 땅이 스스로 뿌려진 이후의 모든 과정을 다 책임집니다. 이 ‘땅’이 비유하는 바는 특정한 대상이 아닙니다. 땅은 뿌려진 것이 반드시 ‘결과’를 낸다는 점을 강조하는 도구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의 결론은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완성된다.’입니다.

    두 번째 비유인 겨자씨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31절에 심겨지는 겨자씨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다’는 사실에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하지만 32절에 이 씨가 ‘심겨지기만 하면’ 땅 속에서 자라 모든 풀보다 커지고 큰 가지를 내어 공중의 새가 깃들일 정도로 크게 자랍니다. 역시 겨자씨 비유에서도 ‘사람이 끼어들 여지’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뜻입니다. 비록 안 보이고 느끼지 못해도 그분이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위해 계속 일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두 개의 비유는 결국 ‘추수의 때’를 언급함으로 분명한 ‘마지막’이 있음을 언급합니다. 땅에 뿌려진 씨도 결국 ‘추수의 때’가 이르러 익으면 낫을 대어 추수합니다. 겨자씨도 결국에 자라게 되면 매우 커져서 ‘새 들이 깃드는 결말’을 맞이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재림으로 인한 역사의 끝’에서 결국에는 완성됩니다.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구원과 회복의 드라마’는 언젠가는 반드시 끝맺음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두 개의 비유를 통해 성도인 저와 여러분에게 던지고 싶으신 메시지는 ‘주가 일하시기 때문에 결코 낙심하거나 주저앉지 말라.’는 겁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는 예수님 자신도 알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셨지요. 하지만 분명히 그 마지막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하기에 지금의 고통과 어려움의 상황에 압도되어서 성도에게 주어질 ‘미래의 영광’을 향한 시선을 놓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늘 마주하는 현상의 그 ‘이면’을 볼 수 있는 ‘영안’을 소유해야 합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겁니다. 씨앗이 땅 속에서 자라는 것을 육신의 눈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의식하지 못한 채로 그 과정을 지나갑니다.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기까지 그 전 과정을 우리가 의식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어느 순간 큰 나무가 되어 우리 앞에 놓인 결과를 본다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이 새벽에 결국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고 완성하시는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요청하시는 음성에 귀 기울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구원의 모든 과정을 친히 이루시고 완성하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함께 가자’고 요청하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함께 갑니까? 우리가 무언가를 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할 일은 없습니다. 행하시는 주체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그 날을 기대함으로 그분의 일하심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오직 그분의 일하심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나아갈 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 숨 쉬는 순간마다 ‘여주동행’, 주님과 여전한 동행의 삶을 실천함으로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께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고통스런 현실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하지 말고 결국에는 이루실 하나님 나라에 우리의 초점을 맞추자고 요청하시는 주님의 요청에 반응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미 하나님 나라는 시작되었습니다. 그 무엇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겨주신 그 신앙의 길을 담대히 걸어감으로 결국에는 임하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온전히 세워져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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