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곤 강도사 / 막 4:35-41

◎본문: 막4:35-41

◎개요

35-41절 광풍을 만난 예수님의 공동체

◎본문연구

오늘 본문은 광풍을 만난 예수님의 공동체가 겪는 사건입니다.

본문은 시간적으로 앞의 가르침과 연결이 됩니다. 마가는 그 날 저물 때로 시간을 설정합니다. 예수님은 해변에서 큰 무리를 많은 비유로 가르치신 후, 한적한 곳에서 따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풀어주셨습니다. 같은 날 해가 저물어 갈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함께 건너가자고 권하십니다. 여기에서 가리키는 제자들은 열두 제자들인지 그 이상인지 불분명하지만, 여러 척의 배가 동시에 이동하고 있는 것으로 열두 제자들을 포함한 일부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다고 추정을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행동의 주체가 되실 때에는 언제나 새로운 사건의 시작을 끌고 들어옵니다.

건너가자는 제안이 궁극적으로는 마가복음 5장 첫 단락에 등장하는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서 귀신 들린 사람과의 만남을 염두에 두셨겠지만, 예수님은 그곳으로 가는 과정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계시하는 중요한 기회를 마련하신다는 것이죠. 이처럼 예수님의 이동 경로는 시간과 함께 본문의 배경과 장소를 위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건너가자고 하신 저편은 앞선 가르침이 해변과 근처 한적한 곳이었기 때문에 갈릴리 바다를 낀 정반대편을 의미하겠죠. 앞서 4장 1절에 바닷가에서 가르침을 위해 배를 이용하셨는데, 이제는 사역을 위한 이동 수단으로 배가 등장을 합니다.

또 다시 무리와 제자 그룹이 구별됩니다. 한창 공적 사역을 하시던 때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따로 구분하셨듯이, 또다시 제자들과 예수님의 특별한 여정이 마련되는 것이죠. 이전의 장소는 산이었는데, 이제는 바다인 것이죠. 주목할 만한 점은 예수님께서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신 후, 행동의 주체가 제자들로 바뀐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수동적으로, 제자들은 능동적으로 묘사됩니다. 이것은 앞으로 다가올 인물들의 역할과 사건의 성격을 미리 알려주고 있는 것이죠. 먼저 마가는 제자들이 무리로부터 떠남으로써 스스로를 분리했다고 묘사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갑니다. 아무 정보도 없이 예수님은 어느새 홀로 배에 오르셨습니다.

여기서 개역개정은 이미 배에 오르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모시고 바다 건너편으로 출발했다는 뉘앙스를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4장 1절에서 예수님께서 배에서 가르치시고 계셨던 상황과 곧바로 연결해서 볼 때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예수님은 비유를 주신 후 해석을 위해 제자들과 따로 구별된 시공간을 가지셨죠. NIV성경은 계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배 안으로 모시고 갔다라고 번역합니다. 배에 계신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시고 간 것이죠. 그리고 배 안으로를 배로라고 번역을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보면, 제자들이 곁에 계신 예수님을 모시고 함께 배로, 배 쪽으로 갔다는 말이 됩니다. 주도권 차원도 고려한다면 충분히 개연성 있는 해석인 것이죠. 이에 근거해 장면을 재구성해보면, 한 배에 모든 제자가 오를 수 없는 상황에서 열두 제자 이상의 그룹이 함께 이동해야 합니다. 그들 중 최측근 제자들 몇 명이 예수님을 모시고 한 배로 오르자, 다른 제자들이 삼삼오옹 다른 배에 나누어 오르면서 새로운 사건으로 출항하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승선하신 배를 중심으로 빠르게 전개됩니다. 갑자기 큰 광풍이 일어나죠. 베테랑 어부들도 어찌할 수 없이 순식간에 물이 배에 들이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날이 저물어 출항을 했으니 어두워진 밤바다에서 제자들이 탄 배들이 위태롭게 요동을 칩니다. 자칫 서로 부딪치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파선하게 되겠죠. 배를 구할 어떤 노력도 소용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다를 건너자고 하셨고, 제자들은 순종했는데 생명을 위협하는 커다란 위기에 봉착한 셈인 것이죠. 긴박한 상황, 여기에서 제자들의 관심은 당연히 예수님에게 향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상황에도 예수님은 아래 칸 고물, 뒷부분에서 주무시고 계신 게 아닙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은 까닭은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였지만, 주무시는 예수님을 보고 아마 제자들은 어안이 벙벙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선생님! 하고 소리치며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웁니다. 그동안 놀라운 기적과 따뜻한 사랑으로 무리를 정성껏 돌보아주셨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바다를 건너자 하셔서 이렇게 되었는데, 최측근인 자신들을 돌보지 않고 방관하고 계신 것에 불편함을 감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본문 속 행동의 주체는 제자들로 묘사가 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무리를 떠났고, 예수님을 모시고 배에 탔으며, 노를 저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주도적인 행동을 큰 광풍이 무력화하는 것이죠. 광풍이 일어났고, 만든 물결로 배를 때립니다. 여기에 제자들은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죠. 그들의 어떤 주도적 행동도 답이 되지 못합니다.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배에 함께 승선하신 예수님에게 가서 도움을 청하는 것 뿐입니다. 제자들의 원망 섞인 탄식에 어떤 반응도 없이 예수님께서 태연히 일어나십니다. 그리고 드디어 행동의 주도권을 움켜쥐십니다.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를 향해 잠잠하라 고요하라 고 명령하십니다. 자연의 힘을 제어할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의 꾸짖음과 명령에 바람과 바다가 순식간에 힘을 잃습니다. 큰 광풍이 예수님 앞에서 아주 잔잔해지는 것이죠.

바람과 바다가 그치자, 예수님의 시선이 사색이 된 제자들을 향합니다. 그리고 이제 제자들을 책망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바람을 무서워한 것을 꼬집으시며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십니다. 여태 예수님과 동행하며 경험한 놀라운 일들로도 충분한 믿음 얻기가 어려웠을까?

하지만 어느 누가 삼킬 듯이 덤벼드는 바람과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책망은 단순히 꾸짖음이 아니라 더욱 확실한 믿음을 심어주기 위함입니다. 이 일을 위해 바다를 건너자고 하신 것이죠. 제자들에게 이 일은 죽음 코앞까지 간 상황에서 맛본 예수님의 돌봄이었기 때문에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되었겠죠. 그들이 두려워하며 이구동성으로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라고 고백합니다.

죽음 앞에서 토해낸 탄식은 이렇게 위대한 신앙고백으로 승화되는 것이죠. 예수님이 제자들을 이런 경험으로 이끄신 것은 향후 제자들이 예수님을 뒤이어 복음 사역을 주도적으로 전개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경험도 이성적 판단도 작동하지 않는 수많은 위기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 권세가 제자들을 붙잡고 죽음으로 끌고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죠. 그 때마다 오늘의 경험을 소환해야 할 것입니다. 바람과 바다도 복종하는 예수님이 그들의 배에 계십니다. 그들이 할 일은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탁하는 것이죠.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행동의 주도권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있음을 우리는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해서는 아무 것도 해결이 되는 것이 없다라는 것이죠. 우리 자신을 내려놓고 예수님께서 우리 행동의 주체가 되어달라고 내어 맡길 때, 전적으로 의지하며 나아갈 때, 우리가 알 수 없고 생각지도 못한 예수님의 방법대로, 예수님께서 행하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우리의 경험이나 이성적 판단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기적을 일으키시며, 선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의지하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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